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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무거운 짐 짊어졌던 루터, 자유와 해방을 외쳤다

[LA중앙일보] 발행 2017/10/17 미주판 22면 기사입력 2017/10/16 18:45

종교개혁 500년, 개혁의 현장을 가다 (3)

루터가 마지막 설교를 했던 설교단.

루터가 마지막 설교를 했던 설교단.

마르틴 루터의 생가(왼쪽)와 죽음을 맞이한 사가.

마르틴 루터의 생가(왼쪽)와 죽음을 맞이한 사가.

한 곳에서 태어나고 죽은 루터
마지막 설교 못 끝내고 눈 감아

죄와 죽음에 대해 고민하던 중
벼락 사건 겪고 수도원으로 향해

금욕과 절제 통한 신앙적 사투
타락한 현실 목격 후 은혜 깨달아


아이슬레벤은 마르틴 루터(1483~1546)의 인생 궤적이 담긴 작은 마을이다. 그는 이곳에서 나고 죽었다. 공교롭게도 인생의 처음과 끝을 한 지점에서 맞이한 셈이다. 루터는 왜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렸을까. 나는 루터의 족적을 쫓았다.

독일 아이슬레벤=장열 기자

8월28일. 아이슬레벤에 있는 성 안드레아스 교회를 찾아갔다. 루터가 마지막 설교를 했던 장소다.

그때 설교 본문은 마태복음 11장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 구절은 어쩌면 루터를 향한 하늘의 음성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고단한 길을 걸었던 그에게 하늘이 영원한 안식을 허락하는 암시였을까. 기력이 다한 루터는 설교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도중에 그 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사흘 후 영원히 눈을 감았다.

그가 섰던 설교단 앞에서 나는 잠시 사색에 잠겼다. 루터가 짊어졌던 무거운 짐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 질문을 안고 루터의 생가와 바로 옆에 있는 성 베드로 바울교회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1483년 11월10일 태어났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이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아직도 세례대가 원형으로 보존돼 있었다.

본래 인간은 생과 사의 도상에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존재다. 중세 때는 더욱 그랬다. 루터는 출생부터 죽음과 밀접했다. 당시 흑사병이 온 유럽을 덮쳤다. 유럽 인구의 절반 정도가 순식간에 사라졌었다.

불가항력의 죽음은 유한한 인간에겐 근원적 공포다. 신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건 사후에 대한 두려움이다. 심판을 피하려면 죄를 사함 받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 하나님을 만족시켜야 했다. 중세 때 팽배했던 은혜에 대한 인식이다.

한겨울, 그의 부모는 갓 태어난 루터를 데리고 물 세례를 받기 위해 교회를 찾았다. 당시 일반적 풍경이었다. 그만큼 죽음이 일상과 가까웠기에 유아 세례는 하루라도 빨리 천국을 갈구하려는 표현이었던 셈이다.

루터의 생가(현재 박물관)에는 그의 어린 시절의 흔적이 묻어난다. 루터의 부모는 그가 법률가로 성장하길 원했다. 체벌을 가할 정도로 그를 엄격히 훈육했다. 교육열도 대단했다. 어렸을 때부터 라틴어 학교에 보내 각종 지식을 습득하게 했다. 루터는 영특했고 우수했다. 부모의 바람대로 유명한 에르프루트 대학에 법학도로 입학했다.

물론 루터는 체벌과 엄격한 교육 환경속에서 부모를 실망시켜선 안 된다고 여겼다. 그러한 성향은 훗날 수도사의 길을 걸을 때 초기 루터의 신앙적 습성과도 연결됐다. 죄에 대한 일종의 강박이다.

나를 태운 버스는 스토테른하임 지역의 한 넓은 들판으로 향했다. 그곳엔 큰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독일어로 새겨진 글귀가 눈에 띈다.

"종교개혁의 전환점, 하늘의 번개가 젊은 루터에게 길을 보였다."

루터는 친구와 함께 이 길을 걷다 벼락 사건(1505년 7월2일)을 경험했다. 그때 벼락으로 친구를 잃은 루터는 벌벌 떨며 하늘에 서원했다. 목숨만 건질 수 있다면 사제가 되겠다고. 그만큼 루터에게 죽음이란 곧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루터는 그 길로 인생을 틀어 어거스틴 수도원으로 갔다.

다음날 나는 에르푸르트 지역의 어거스틴 수도원을 찾아갔다. 벼락 사건 후 보름 후 루터도 이곳에 도착했었다. 그는 삭발을 한 뒤 십자가 앞에 납작 엎드렸다. 모든 것을 비우고 버리겠다는 다짐이다.

루터는 왜 이곳을 선택했을까. 나는 적막한 느낌의 수도원을 거닐었다. 내부는 간소한 치장이 전부다. 잡념의 여지를 두지 않는 공간이다.

루터가 입문했을 당시 이곳은 에르푸르트에서 가장 규율이 엄격했다. 철저한 수도 생활을 요구했다. 그만큼 루터에겐 인간 본연의 죄성과 맞선 투쟁과 고행이 필요했으리라. 금욕이 죄에 대한 해결과 구원을 쟁취하는 지름길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발버둥칠수록 내면의 갈증은 더해갔다. 평안은 일시적일 뿐 그는 여전히 죄성과 싸우는 불의한 존재였다. 육체를 부단히 제어했지만 뭔가 불안했다. 하늘은 그럴수록 더욱 '의'를 요구하는 것 같았다.

그때 이곳 수도원장이자 스승이었던 요한 폰 슈타우피츠가 루터의 고민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슈타우피츠는 크고 작은 죄를 매일같이 고백하던 루터를 보면서 죄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타락한 존재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려준 인물이다.

그리고 루터가 그 답을 성경에서 스스로 찾게끔 신학 연구를 권유했다. 이 모든 과정은 훗날 루터가 믿음과 은혜에 대한 개념을 깨닫는 신학적 자양분이 된다.

나는 수도원 가까운 곳의 에르푸르트 대성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루터가 1년간의 수도원 생활을 마치고 사제 서품을 받은 곳이다.

역사는 참으로 짓궂다. 루터가 서품을 받은 제단 바로 밑에는 요하네스 자카리우스의 무덤이 있었다. 자카리우스는 종교재판관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100여 년 전 체코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를 화형에 처하도록 판결을 내렸던 인물이다.

루터는 그 위에 우뚝 섰다. 짓밟힌 줄 알았던 종교개혁의 씨앗이 다시 싹을 트는 순간이었다.

에르푸르트 지역은 은둔과 고행의 선상에서 루터가 본격적으로 시대적 현실을 목격한 곳이다.

그는 1510년 겨울, 슈타우피츠의 지시로 로마교황청 방문을 위한 순례를 떠났다. 에르푸르트에서 로마까지는 약 800마일(약 1300km). 그 길을 떠나던 루터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교황이 현존하는 도시에 대한 기대가 너무나 컸으리라.

그러나 루터가 당도한 로마는 머릿속에 그리던 신앙적 이상과 괴리가 컸다. 종교의 타락은 심각했다. 성직 매매가 활발했다. 사제들은 성적으로 문란했다. 심지어 돈을 받고 성유물을 보여주며 인간의 구원을 설파했다.

루터는 그 모든 광경을 목도했다. 단순히 윤리적인 타락만 본 게 아니었다. 비윤리는 썩은 문제를 드러내는 표면일 뿐, 루터는 그 뿌리를 봤다.

“인간은 본래 죄인이다.”

그는 자신과 모든 인간이 짊어진 죄를 바라보았다. 분명 그 짐을 어떻게 내려놓아야 하는지를 평생 고뇌했을 테다.

루터는 그 지점에서 비로소 예수가 말했던 은혜의 본질을 깨닫지 않았을까. 나는 그의 마지막 설교 본문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문했다. 무거운 짐을 진 우리는 결국 어디를 향해 걷는가.

짐(죄)을 내려놓는다는 건 회심에서 비롯된다. 죄에서의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오롯이 체득함으로 죄인이라는 존재로부터 해방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당시 인간과 시대가 흘러가야 할 방향을 가리켰다. 그가 선택했던 마지막 설교 본문은 그가 깨우친 궁극의 답이었으리라.
마르틴 루터가 수도사 생활을 했던 어거스틴 수도원 모습.

마르틴 루터가 수도사 생활을 했던 어거스틴 수도원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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