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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흡 칼럼] ‘남한산성’과 오늘의 한반도 정세

영화 ‘남한산성’이 화제다. 1636년 병자호란을 다룬 김훈의 소설이 원작이다. ‘남한산성’이 화제가 되는 배경은 아마도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강대국 세력정치와 병자호란 당시의 고단한 현실이 겹쳐지기 때문일 것이다. 지는 명(明)과 뜨는 청(淸). 두 태양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게도 구럭도 다 놓친 조선의 서글픈 역사가 아득한 과거로 여겨지지 않는다. 현실을 수용하고 훗날을 도모하자는 주화(主和)파와 명분을 저버리고 현실과 타협할 수 없다는 척화(斥和)파의 대립은 오늘도 진행형이다.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인조가 대국(大局)을 살피며 좀 더 기민하게 대처했다면 ‘오랑캐 나라’ 임금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수모와 치욕은 면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대의명분도 좋지만 최대 피해자인 백성을 먼저 생각했다면 한발 물러서서 유연성을 발휘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다 버스 지난 다음 손 흔드는 격이다.

삼전도의 굴욕으로 더 유명한 1636년 12월의 병자호란은 그 결말이 너무나 허망하다.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징벌한 청태종은 46일간 1만 2천명으로 남한산성 속에 들어가 숨어버린 조선 왕 인조를 치욕스럽게 항복시킨다. 항복의식으로 ‘삼배 구고두(三拜九叩頭)’ 즉, 세번 큰 절을 하고 아홉번 땅바닥에 머리를 박게 했고, 인조의 이마에선 피가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삼전도에 차려진 높은 단 위에서 청태종은 황제의 권위로서 내려다보았다. 이 역사에서 도대체 가르칠 것이 무엇인가. 치욕말고는 없다.

인조는 주화파와 척화파의 사이에서 갈팡질팡 한다. 힘이 밑바탕 되어주지 못한 최고 권력자의 침묵의 언어는 슬프다. 임금의 무능과 조선이라는 나라의 한심한 무력감이 극치에 달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12월에 성에 든 인조는 새해 첫날을 맞아 베이징을 향하여 명의 천자에게 올리는 의식인 망궐례를 행한다. 임금과 세자가 함께 음악에 맞춰 곤룡포를 휘날리며 춤을 춰 명에 대한 공경과 복종을 표하는 일이다. 20만 청군이 자그마한 성을 포위하고, 임군의 거처인 산성의 행궁을 망월봉에서 내려다보며 홍이포를 조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인조와 대신들은 그 와중에도, 어떻게 하면 망궐례를 예에 걸맞게 행할 수 있는지를 놓고 난상토론 한다. 과연 동방예의지국이다. 그런 묘사를 통해 독자들은 병자호란의 시대 속으로 쉽게 빨려들어간다. 하지만, 이 전망과 희망과 힘이 없는 시대와 거리를 두고 싶은 게 작가만은 아니다. 독자들 누구도 이 소설 속 그 어떤 인물도 되어보고 싶지 않고, 그 시대 속에 감정이입하기도 싫다. 대세가 이미 기운 상황에서 주화파와 척화파의 말싸움은 하나의 넌센스가 돼 버리는 상황이다.

1637년 1월 18일 최명길이 비변사에서 항복문서를 교정하고 있는데 예조판서 김상헌이 들어와 국서를 찢었다. 그의 논리는 이랬다. “명분이 일단 정해진 뒤에는 적이 반드시 우리에게 군신의 의리를 요구할 것이니, 성을 나가는 일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한번 성문을 나서게 되면 또한 북쪽으로 행차하게 되는 치욕을 면치 못할 것이니, 신하들이 전하를 위하는 계책이 잘못 되었다.” 최명길은 찢어진 종이를 주워서 붙이면서 “국서를 찢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 되고, 또한 국서를 붙이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면서 국서를 다시 썼다. 최명길은 “김상헌이 도량이 편협하고, 기개가 강직해 좋은 곳에 들어가면 천 길 낭떨어지에 서있는 기상이 있다. 그러나 잘못 들어간 곳에서도 뜻을 굽혀 고칠 생각을 하지 않으니, 식견이 모자라서인 듯하다”고 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피신해 46일간 당대 최고 엘리트 관료들과 답이 없는 입씨름을 하던 사이, 백성들은 굶주림과 추위, 청의 약탈과 살육의 제물이 됐다. 현실의 문제를 치유하고 해결할 실질적 힘도 없고, 명예롭게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할 용기와 기백도 없는 남한산성의 척화파와 주화파는 백성과 군인들을 남한산성에 가두고 입씨름으로 시간을 허송했다.

그러면 두 사람의 사후의 평가는 어땠나? 인조를 이은 효종을 북벌론을 국시로 했고, 북벌론은 송시열이 앞장 선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효종의 북벌론과 송시열의 북벌론은 달랐다. 전자는 왕권강화를 위해, 후자는 노론의 정치적 헤게모니 확보를 위한 명분으로 시행된 것이었다. 이 송시열의 숭명배청 이데올로기가 바로 김상헌의 척화론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후 노론이 주도하는 서인 정국에서 김상헌은 높이 평가되고, 최명길은 저평가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척화파의 거두 김상헌은 조선 후기의 권력을 틀어쥔 서인, 노론, 안동 김씨 세도정치로 맥을 이으며 ‘절개의 의인’으로 과대 포장됐다. 실리의 길을 가고자 했던 주화파 최명길은 많은 사대부들로부터 ‘나라를 팔아먹은 자’로 낙인 찍혔다. 시대를 훌쩍 뛰어넘고 보면, 그깟 사대를 누구에게 하느냐는 결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이후, 조선 역사는 사대의 대상을 바꿔가며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 일들’의 연속 아니었는가.

지금의 정치판은 상대방을 적폐로 몰아 서로 손가락질하기에만 바쁘다. 400년 전 세상과 지금의 국제정치 환경도 다를 바 없다. 여전히 한국은 그 대상만 달라졌을 뿐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눈칫밥을 먹고 살아가고 있다. 그 많은 외침을 이겨내고 나라를 빼앗기는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아직 우리의 국력은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을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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