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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절차 중시하고 자체 운영기구도 설립

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
도산 공화국(6)
파차파 캠프의 모습

계절 노동자 빼도 200여 명 거주
타지역 갔다와도 일자리 구해줘
1913년 한파로 오렌지 타격 입어
농장 닫아 일자리 없어져 LA이주


안창호는 파차파 캠프를 민주주의 한인 공동체로 생각하고 있었다. 도산 안창호는 자녀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에게 민주주의 교육을 시켰다.

'팀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야구 규정으로부터 지도를 시작하여 아이들은 팀워크를 빨리 배웠다. 돈을 번 사업가는 투자를 하고 일반인들은 자립심과 협동심을 갖도록 권유했다. 도자기 사업을 벌이고 출판사, 신문사 등을 설립하여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서로 협력하여 운영하도록 하였다. 경찰관과 감찰관 제도를 도입하여 한인 공동체가 자치적으로 운영되도록 하였고 민주주의 절차를 중시하면서 대한 독립을 위한 열정을 쏟아냈다.

파차파 캠프는 단순히 한인 노동자들의 임시 거주 지역이 아니었다. 당시 캘리포니아의 계절노동자들은 계절에 따라 이동하면서 노동을 하고 수확이 끝나면 다른 곳으로 이동했는데 임시 거주지를 형성하여 숙소로 사용하다가 다른 곳으로 떠났다. 임시 거주지는 숙소 이외에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리버사이드에 형성된 한인타운은 임시 주거 지역이 아니었으며 초기 미주 한인 사회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미국 최초의 한인타운을 형성한 것이다. 즉 커뮤니티 센터를 만들어서 고된 일이 끝나면 한인들은 모여서 예배를 드렸고, 결혼식, 생일 잔치, 토론회, 강연회 등도 개최되었다.



또한 공립협회와 대한인국민회 리버사이드 지방회를 중심으로 독립 운동에도 적극적이었으며, 1906년 신민회 발기도 리버사이드에서 했다. 신용하는 "도산이 이강과 임준기 등 한인공립협회 회원들에게 대한신민회의 창립을 발의하고, 대한신민회 취지서와 대한신민회 통용 장정을 초안하도록 하였다"고 설명했다.

이 단체가 국권회복운동에 목적을 두고 있으므로 반드시 본국에서도 발기하여 조직되어야 한다는 데 합의하고, 신달원, 박영순, 이재수 등이 여비와 조직 활동 자금을 마련하여 도산을 대표로 한국에 보냈다. 그리고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이 창단되었을 때 도산의 가족은 리버사이드에 거주했다. 다만 본부는 샌프란시스코에 설립했던 것이다. 따라서 파차파 캠프는 도산 안창호의 미주 지역 독립운동의 메카 역할도 담당했던 것이다.

전낙청의 딸이며 리버사이드에서 출생한 엘렌 전이 남긴 글을 통해 가족이 하와이에서 샌프란시스코를 거처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로 이주한 상황을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우리 가족은 하와이에서 달랑 옷과 가방만 들고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로 이주했다. 그곳은 철도역 근처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캠프에는 약 20여 채의 조그만 집들이 있었는데 모두 똑같이 빨간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다. 예전에 철도 건설 인부들이 사용하던 건물인데 철도가 완공된 이후 버려진 집들이었다. 한인들은 이곳에 1904년부터 이주해 와서 정착하기 시작했다. '한인 노동국'이라는 한글 간판을 보고 비로소 목적지에 도착한 것을 알았다. 누군가 나와서 우리 가족을 맞이해 주었는데 우리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우리 가족을 방 3개의 집으로 안내했다. 침대도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지푸라기 위에서 자지 않아도 된다'고 소리치며 기뻐하였다. 등유 스토브와 램프가 있었고 부엌에는 쌀과 식기들이 있었다. 우리는 '김치도 있다'고 놀라 소리쳤다. 전씨 부인은 감격해서 얼굴을 돌리고 눈물을 흘렸다. '사람들이 너무 친절해!'하며 우리는 좋아했다."

엘렌 전은 "비록 판자촌의 조그만 집이었지만 하와이에서의 생활보다는 훨씬 좋은 환경인 듯했다. 이미 한인들이 정착해서 쌀과 김치를 준비해 준 정성도 보였다"고 회상했다.

도산 안창호와 친분이 있는 차의석과 신씨 가족도 하와이에서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프레즈노에서 포도를 따다가1905년에 리버사이드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그들은 하와이에서 같은 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왔던 오씨 가족들과 재회했다. 또한 차의석의 사촌인 차정석 가족도 1906년에 리버사이드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당시 캘리포니아 주에서 일하던 대부분의 아시안 노동자들은 소위 '계절 이주 노동자(seasonal migratory farm worker)'로서 계절에 따라 이동하면서 농장에서 일했다. 따라서 리버사이드 거주 한인 노동자들 중 일부는 오렌지 농사가 끝나면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다.

1910년 미국 인구 센서스에 의하면 파차파 캠프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은 약 100여 명이다. 그러나 파차파 캠프에 거주한 한인 명단은 150여 명이 넘는다. 물론 그들은 동시에 함께 파차파 캠프에 거주한 것은 아니며 계절노동자로 타지역에 갔다가 다시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로 돌아오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버사이드 한인타운은 최소 100명에서 최대 200여 명의 한인들이 모여 마을을 형성하였고 도산 안창호가 1913년 12월 LA로 이주할 때까지 독립운동의 메카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크리스마스 직전부터 시작되는 오렌지 수확 시즌에는 한인 노동자들이 리버사이드로 몰려왔다.

차의석은 "포도 시즌이 끝나자마자 나는 신씨 가족과 함께 오렌지 시즌이 시작되는 리버사이드로 이주했다. 오렌지 시즌은 크리스마스 직전부터 약 10주 동안 계속된다. 나는 나의 지인과 옛 친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리버사이드에 온 것이 매우 기뻤다. 나의 오랜 친구 오씨, 안창호 선생, 그의 부인 이혜련 여사, 그리고 이혜련의 삼촌이며 리버사이드 캠프 보스이자 제일 유명한 사람 김인수"이다.

김인수가 이혜련 여사의 삼촌으로서 도산 안창호가 타지역을 순방하면서 독립운동에 전념하는 동안 이혜련 여사를 돌본 주인공이라는 것이 다시 확인되었다. 차의석 역시 오렌지 산업이 호황을 누리던 1905년부터 1913년까지 리버사이드가 미주 한인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는 한인 공동체 생활의 중심 역할을 했고 한인 노동자들은 시즌에 따라 잠시 근처의 업랜드, 레드랜즈, 클레어몬트 등에서 일을 하고 다시 리버사이드로 오기도 했다. 또한 다른 계절노동자들은 계절에 따라 중가주와 북가주로 이주했다가 본부 역할을 한 리버사이드로 다시 이주해 오렌지 산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파차파 캠프는 한인 노동국을 통해 일자리를 계속 공급해 주었다. 파차파 캠프는 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한 가족들이 함께 거주했던 곳으로 미국 최초, 그리고 최대의 한인타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913년 1월에 몰아친 한파로 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농장들이 문을 닫았고 일자리를 잃은 한인 노동자들도 더 이상 리버사이드에 머물 수 없었다. 도산도 가족과 함께 1913년 12월 LA로 이주한다. 그러나 1918년까지 파차파 캠프는 한인타운으로서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유지했다.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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