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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업] 아버지의 인각

모니카 류 / 방사전 암전문의

아버지의 글 앞에 선다. 내리 방향으로 화선지에 쓰신 글은 시인 것 같다. 아버지가 흘려 써 내려간 시는 열네 자의 한문(漢文)으로 되어 있다. 초서로 쓰신 부분이 있어 전부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무슨 뜻일까. 언제 쓰셨을까?

우측에서 좌측으로, 또 위에서 아래로 써 내려진 두 줄의 시. '작일쾌청(昨日快晴)…인생(人生)…부침(浮沈)…'이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고 덧없다는 뜻 같다. 끝막음한 시의 왼쪽에 조금 작고 가늘게 또 한 줄의 흘려 쓰신 글이 있다. 완성한 연월 같고 아버지의 호(號)처럼 보이는 세 글자가 작품을 끝내고 있다. 그리고 그 밑에 두 개의 정사각형 인각이 상하로 찍혀 있다. 빨간색이다. 재어 보니 4cm의 도장이다. 시의 영역 밖, 화선지 오른쪽 위에 훨씬 얇고 긴 사각 형태를 한 또 하나의 빨간 인각이 찍혀 있다. 아버지의 호(號)가 새겨진 도장 안의 한문을 해독하지 못해 아버지의 호가 무엇인지 터득하지 못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형제들과 유품을 정리하다가 갖게 된 것이었다. 한국 전통 양식이 아닌 서양식으로 플렉시 글라스 액자 안에 화선지를 띄웠다. 멋있다. 작품은 동양화만 모아 놓은 곳에 걸려 있다. 막내로 늦게 태어난 나는 아버지와 가깝지 않았다. 아버지의 필묵을 본 기억이 없다. 아버지가 서예를 쓰시는 모습도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아버지의 흔적이라고는 두 장의 서예품과 옥편(한문사전)이다. 아버지는 책, 노트북, 연필, 만년필 같은 학용품을 귀히 여기시었다.

그 작품 앞을 지나칠 때마다 느린 붓의 움직임과 날림의 힘을 느낄 수 있다. 끝막음을 하시며 떨군 검은 먹의 모습이 멋있다. 무슨 생각을 하시며 쓰셨을까. 분명 아버지는 새벽에 먹을 갈고, 붓을 잡으셨고 천천히 선을 그으셨을 것이다.



그러던 아버지. 그리고 나.

지난 한 달 동안 미 동부, 한국을 거쳐 일본을 다녀와야 했다. 여행 중 어느 날 지나치던 쇼윈도에서 빨간 펜을 보았다. 되돌아갔다. 고인이 된 미국 여배우의 이름을 붙여 만든 한정판의 볼펜이란다. 글래머였던 그녀는 단순한 한 줄짜리 아코야 진주 목거리를 즐겼다고 한다. 볼펜의 클립은 하나의 진주를 붙여 끝막음 되어 있다. 펜은 싸지 않았다. 어이없게도, 아버지 생각이 나서 피식 웃었다.

아버지는 저쪽 세계에서 자주 나에게 되돌아 오신다. 새벽 침묵 속에 움직이는 연필의 나무 향기 가운데. 아버지의 표현대로 '개발소발' 마구 써가는 내 필기 가운데. 검은 옻칠한 일본 가옥 처마에. 또 친구가 선사한 인각도장과 함께.

인각도장을 한참 들여다본다. 아름다운 무늬가 이리저리 흐르고 있는 돌, 제법 무거운 옥돌에 나의 한국이름이 한문으로 새겨져 있다. 아버지의 인각만큼 큰 네모진 도장이다. 나는 과연 '이소승다(以小勝多)'의 마음가짐으로 붓과 먹을 써서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내 환자들의 이야기를 수필이 아닌 시로 써낼 수 있을까. 나는 아버지처럼 한문으로 화선지에 획을 긋지는 못할 것이다. 대신 아름다운 한글로 획을 그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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