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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누드의 재발견

전수경/화가

쌀쌀하다. 아침에 현관을 나서다 다시 들어가 두툼한 외투로 갈아입었다. 가을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채 추위에 적응해야 하나 보다. 머지않아 가로의 노란 은행이며 산천의 울긋불긋한 단풍들이 꺼풀을 걷고 속살을 드러낼 거다. 나무는 벗고 나는 입는다.

벗은 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이미지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인은 건강한 남성의 몸과 고귀한 여신의 몸을 숭고하게 여겼다. 그들은 신이 창조한 벗은 모습 그대로를 그렸고, 수학적 규범(비례)에 맞는 성숙한 남녀의 몸을 강조했다. 그야말로 '조각 같다'는 작품들이 쏟아졌다. 영국의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는 이런 작품들을 '누드(nude)'라 하고 그냥 막 벗은 '알몸(naked)'과 구별한다.

물론 중세 시대에 누드는 금기였다. 성스러운 분위기를 해친다며 온몸을 꼭꼭 숨겼다. 그런 누드가 활달한 빛 속에 다시 드러난 것은 16세기 르네상스 화가들에 의해서다. 사람의 몸이 신화에 갇히지 않고 현실의 모습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누드가 마냥 평탄한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사진의 발명은 누드에 결정적 위기였다. 누드 본래의 개념이 도전받게 되고 심지어 알몸과 혼동되기 시작했다. 누드는 미술의 전유물에서 점차 사진·영화·인쇄·포르노물 등에 그 자리를 넘겨주고 본래의 빛을 잃어갔다. 누드는 시간이 흐를수록 대수롭지 않게 흔한 것이 되거나 더 자극적인 것이 되어 간다.

나는 인체를 주로 그리는 미술가다. 내가 누드를 처음 의식한 것은 어린 시절 갖고 놀던 바비인형에서였다. 나는 인형의 옷을 갈아입히면서 그 아름다운 몸을 보게 됐다. 또한 TV와 스크린에서 원더우먼을 보면서 벗은 몸의 여인을 의식했다.



누드와 알몸이 혼동되는 요즘 누드가 재발견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디지털화로 곳곳에 야동이 넘쳐나는 시대에, 반가운 현상이다. 그렇다고 누드가 예전처럼 아름다운 몸만 표현하는 게 아니다. 지난해 한국에 전시된 멕시코 여성 화가 프리다 칼로는 교통사고로 35차례나 수술을 받은 끔찍한 자신의 몸을 그렸다. 온몸이 쇠틀에 묶이고 여기저기 못이 박힌 세미 누드 자화상이다. 이 '부러진 척추'는 소아마비와 교통사고, 거듭된 이혼의 후유증을 딛고 일어서는 강인한 여성을 상징하면서 세계적 명작이 됐다.

냉정하게 보면 인류 역사에서 가장 변화 없는 디자인을 지닌 것이 몸이다. 그럼에도 누드는 인간의 다양한 감성과 상상력을 자극한다. 누드는 나 자신과 이웃, 그리고 세상을 연결하는 일차적 매개이기에 늘 뜨겁고 변화무쌍하다. 그래서 누드화는 결코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끊임없이 새롭게 등장하고 재발견된다는 뜻이다.

이제 곧 추운 겨울이 다가올 것이다. 모딜리아니의 '누워있는 나부(裸婦)'나 칼로의 '부러진 척추'는 비뚤비뚤하고 거친 누드화지만 깊은 공감을 부른다. 매끈하게 예쁘진 않지만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누드화. 곧 맞을 계절이 그런 누드화 같은 겨울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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