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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 안중근 의거 후 망명객들 파차파로 이주

도산 공화국 <7>

단독범 주장에 지도자들 풀려나
한국 탈출 학생들 리버사이드로
한일합방 규탄 '망국일' 행사 가져
1918년부터 여성들도 회원 자격


독립 운동의 메카로

파차파 캠프는 초기 미주 한인 사회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다. 물론 공립협회와 대한인국민회 본부는 샌프란시스코에 설립되었으나 이 두 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회원 중 상당수는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이었다. 또한 대한인국민회 지방회가 가장 먼저 생긴 곳 역시 바로 리버사이드의 파차파 캠프이다. 파차파 캠프 한인들은 공립협회와 대한인국민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파차파 캠프 현지에서도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신한민보' 1909년초 보도에 의하면, 당시 대한인국민회 지방회는 샌프란시스코, 레드랜즈, 리버사이드 등에 설립되었는데 지방회 보고가 가장 활발한 곳이 바로 리버사이드이다. '신한민보' 1909년 4월 7일 보도에 "리버사이드 지방회장 차정석씨의 보고를 근거하니 본월 삼일 통상회의 결안은 왼쪽과 같다. 신입회원은 백신구씨, 평의원은 5명을 상치하기로 의정 후 김인수.이치환.백신구.김기만.김윤각씨가 선발되었다고 한다"라고 했다. 그리고 신한민보 1909년 4월 14일 보도에 "본월 십삼일에 리버사이드 지방회장 차정석씨의 보고를 근거하니 본월 십일 특별회의 신임 임원은 왼쪽과 같다. 회장 차정석, 부회장 백신구, 총무 이응호, 서기 백신구, 재무 김기만, 학무 이응호, 법무 김인수, 구제 김윤각, 대의원 이치완.이응호라 한다"고 했다. 기사에 실린 인물들은 리버사이드 거주 한인들이고 이들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곳이 바로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이다. 1909년 5월에는 토론회도 조직하여 활발한 지식 교류 활동도 전개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암살했다는 소식을 파차파 캠프 한인들이 듣게 되었고 파차파 캠프는 또 다시 미주 한인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엘렌 전은 그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파차파 캠프는 다시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인 장로 선교회 건물에서 거의 매일 밤마다 회의가 열렸고 안중근 의사를 돕기 위한 기금 모금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전낙청도 마차를 살 수 있는 금액을 내겠다고 약속했는데 부인이 너무 많다고 불평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당시 대부분의 부인들은 남편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불평은 했지만 남편들은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의 행동에 대해 한인 그 누구도 은혜를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거의 매일 밤 모임에서 연설과 기금 모금 행사가 열렸다."

파차파 캠프 한인들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 사건 소식을 듣고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이며 파차파 캠프가 그 당시 미주 한인 독립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재판에서 혼자서 한 행동이라고 주장했고 체포된 한인 지도자들은 풀려나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 리버사이드로 망명객들이 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부분 학생들이었는데 기회가 생겨 한국을 탈출해서 리버사이드까지 온 것이라고 밝혔다. 이 소식을 듣고 파차파 캠프 한인들은 더욱 고무되어 독립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1910년 나라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접한 파차파 캠프 한인들은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기 위해 '망국일' 행사를 거행했다.

"집회가 시작되면서 참석자들은 자리에 앉았다. 여성들은 자리를 떠났고 애국가로 행사는 시작되었다. 미스터 송은 애국가를 힘차게 부르면서 참석자들도 함께해 줄 것을 기대했지만 참석자들의 얼굴에는 체념의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누군가가 '만세 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참석자 모두 '만세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지면서 울음바다가 되었다. 눈물 때문에 기도는 우리 아버지를 시작으로 했으나 미처 다 끝내지도 못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다음은 양반 출신인 임씨의 차례였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만약 안 선생이 여기 있다면 기죽지 말고 머리를 들고 독립운동을 하라고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한 독립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의 지도자들이 곧 돌아올 것이고 안 도산 선생도 곧 올 것입니다. 해외에 살고 있는 우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울 것입니다."

전낙청의 딸 엘렌 전은 안창호가 1911년에 리버사이드에 돌아온 후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를 돌보고 기차를 타고 LA에 도착했다. 이혜련 여사와 필립이 LA로 마중을 나갔다. 이혜련 여사는 남편에게 "내가 바느질과 빨래를 해서 300불을 벌었어요"라고 남편 안창호에게 자랑했다.

안창호는 "이건 정말 기적이오. 독립운동의 동지인 이갑이 병을 얻어 함께 미국에 왔는데 다행히 병은 치료했으나 병상에 누워 있는 신세가 되었고 돈도 없는 상황이오. 대한인국민회 기금도 거의 고갈 상태인데 내가 이 돈 300불을 이갑에게 보내도 되겠소? 이 돈은 그가 더욱 필요로 하오. 나도 이제 노동을 해서 돈을 벌 예정이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혜련 여사는 이갑에게 돈을 보내는 것에 동의를 했다. 이것은 안창호의 동지애를 잘 알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여성 회원들의 참여와 활동

리버사이드 지방회 활동은 위축되었지만 여성들이 대한인국민회 정식 회원으로 등록하면서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독립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대한인국민회 북미 총회는 1918년에 "대한인국민회 헌장 제 1조의 동 1, 2관에 기인하여 북미 총회 관하 미주, 멕시코 각 지방의 여성 동포로서 연령 18세 이상인 자는 모두 입회를 허락하여 권리를 같이 누리고 의무를 같이 행할 것"을 지령했다.

특히 리버사이드 한인타운은 타 지역과는 달리 여성과 자녀들이 함께 거주하는 가족 중심 공동체였기 때문에 여성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했다. 파차파 캠프의 한인 여성들은 초기에는 주로 남편들의 대한인국민회 활동과 독립운동 기금 모금에 간접적으로 동의하는 소극적인 활동을 했으나 1918년 이후부터는 여성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행사에 참여하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확인되었다.

1919년 9월 18일 신한민보는 "리버사이드 지방 한인 부인들은 지난 9월 16일 일반 사회와 국가에 대한 의무를 남자들과 같이 하기로 하였다 하니 참 장려할 만하다.

특히 리운경씨의 부인은 60 당년에 병원에서 고되게 일하여 버는 돈을 우리 사회와 국가에 다 쓴다고 하니 참 그 열성은 모범할 만하더라. 또한 그 지방에서는 각각 한인들의 집에서 간장을 만들어 쓰는 고로 일인의 장을 쓰지 않고 일반 일인의 물화를 모두 배척한다더라"라고 보도했다. 이처럼 여성들이 리버사이드 한인타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파차파 캠프에서 독립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도 역사에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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