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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그 후](6) 교회가 바뀌면 개인과 사회가 변한다

종교개혁 500년, 개혁의 현장을 가다(6ㆍ끝)

구원의 가치 개인에만 국한 안 돼
당시 교회는 이웃과 사회에도 영향
종교개혁 이후 '공동 금고함'사용
금고의 열쇠 구멍이 3개였던 이유
'500주년' 콘텐츠성 소비는 아쉬워
무비판적인 수용 역시 경계해야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본지는 10월 한 달간 특집 기사로 종교개혁의 현장 방문기를 보도했다.

나는 마르틴 루터를 중심으로 종교개혁가들의 족적을 쫓았다. 종교개혁의 역사와 의미는 분명 심오하고 방대하다.



'종교개혁 500주년'이라는 거대 담론이 오늘날 현실에 던지는 화두는 무엇인가. 1517년 10월31일 마르틴 루터가 당시 부패한 종교를 향해 비텐베르크 성교회 정문에 붙인 95개조 논제는 개인을 넘어 사회와 시대의 사조를 한번에 뒤바꾼 대변혁이었다.

루터는 분명 인간은 믿음을 통해 신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외쳤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단순히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걸까. 그렇게만 봐선 안 된다.

중세 기독교의 종교관은 선행과 공덕의 개념을 통해 구원을 이해했다. 말도 안 되는 면죄부 같은 개념이 횡행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이 때문에 신학이 변질됐고 중세 종교는 탐심으로 배를 불리며 사회 전반을 심각하게 오도했다. 급격히 기울어진 중세는 분명 균형추가 필요했다.

혹자는 '믿음'만을 강조했던 루터 탓에 오늘날 교회들이 '행실'이나 '죄'에 둔감해졌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루터에 대한 공과(功過)는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다. 당시 심각하게 비뚤어진 구원론을 재정립하려면 인간의 행위에만 방점이 찍혔던 신학 및 시대적 인식을 타파해야 했다. 이는 불가피하게 대척점에 놓인 '믿음'이라는 개념이 부각돼야만 했던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로 인해 당시 루터의 주장이 유독 인간의 구원관에만 영향을 미쳤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종교개혁은 사회적 가치까지 변화시킬 정도로 여파가 컸다.

비텐베르크 지역에 루터가 살았던 집(현재는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다. 이전 기사에는 전체 맥락상 '면죄부함'을 주로 언급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당시 교회가 사용했던 '공동금고함' 이었다.

공동금고는 종교개혁 이후부터 등장했다. 당시 교인들은 마을에 가난한 이들을 비롯한 고아, 과부, 재난을 당한 사람 등을 돕기 위해 공동금고함에 돈을 넣었다. 그렇게 모인 돈으로 학교도 세웠다.

금고는 특이하다. 거기엔 3개의 열쇠 구멍이 있는데 목회자 대표, 교인 대표, 시민사회 대표가 각각 열쇠를 넣어야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교회 재정에 대한 투명한 관리와 합리적 운용을 보여준다.

또 하나. 교회내 일원이 아닌 시민사회 대표가 공동금고의 열쇠를 갖고 있었다는 건 교회가 사유화된 단체 또는 자신들만의 폐쇄된 집단이 아닌 지역 사회와 밀접하게 연결된 개방적 공동체였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종교개혁을 통해 당시 교회가 인간의 구원뿐 아니라 이웃과 사회를 위한 역할에도 매우 충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행위 또는 행실이 구원의 주요 조건으로 인식됐던 당시 시대 속에서 구원론에 대한 인식이 신의 은혜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과 현실에서의 실천으로 옮겨졌던 셈이다.

실제 이러한 역사는 오늘날 독일 개신교의 자원봉사 시스템을 지탱하는 '디아코니(Diakonie)'의 정신으로 이어지면서 사회 복지의 틀을 다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본지 9월8일자 a-6면>

또, 종교개혁은 일방적 주입에서 성경을 통해 스스로 고민하며 질문하는 신앙으로 변화를 가져왔다. 루터 역시 신앙적 양심에 따른 사색과 깨우침을 저항의 근간으로 삼았다. 특권층만 소유했던 성경이 다시 서민들의 손에 들려지게 했고, 전통과 권위로만 화석화됐던 신앙을 일상으로 스미게 했다. 화려하게 높아지기만 했던 교회 건물과 비본질로 치장됐던 예배 의식이 다시 단순해졌다.

특히 종교개혁의 '만인 사제설'과 '성속 이원론 타파'의 영향력은 신분적 구분이나 위계적 구조에서 벗어나 동등 또는 평등의 사상을 출현시키고 신앙이 가진 의미를 사회, 경제, 정치 등 전 영역으로 확장시켰다. 이는 종교개혁이 여러 면에서 중세를 근세로 끌어갔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요즘 교계 곳곳에서는 각종 행사와 세미나 등을 통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아쉬운 건 '종교개혁 500년'을 탁상 위에 올려놓고 그 의미에 대한 진중한 조명과 깊은 사유보다는 한철 지나가듯 일종의 콘텐츠처럼 소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500주년'이라는 시간적 의미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종교개혁이 갖는 본질적 가치는 499주년이나 501주년이나 변함없이 똑같이 기억되고 기념돼야 한다.

현재 종교개혁 500주년이 ‘반짝’하고 소비되는 한인 교계와 달리 독일의 분위기는 다르다. 독일교회는 이를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루터의 10년(Lutherdekade)’이라는 대주제를 정하고 2008년부터 매해 한가지씩 이슈를 정해 종교개혁의 의미를 되짚어왔다.

매해 다뤄진 주제를 보면 ▶루터의 10년의 시작(2008년) ▶종교개혁과 신앙고백(2009년) ▶종교개혁과 교육(2010년) ▶종교개혁과 자유(2011년) ▶종교개혁과 음악(2012년) ▶종교개혁과 관용(2013년) ▶종교개혁과 정치(2014년) ▶종교개혁과 그림 및 성경(2015년) ▶종교개혁과 하나의 세계(2016년) ▶종교개혁과 500주년(2017년) 등이다. 그만큼 종교개혁이 신앙뿐 아니라 각 분야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물론 루터나 종교개혁이 남긴 흔적에 대해 무조건 또는 무비판적 수용은 경계해야 한다. 루터가 개인적으로 말년에 보인 반유대주의적 성향, 그가 주창했던 평등 사상을 급진적으로 지지한 세력으로 인해 발생한 농민폭동 및 유혈극의 폐해 등은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

또, 종교개혁으로 인해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에 발생한 ‘30년 전쟁’은 심각한 교파의 분열을 불러왔고, 이는 정치세력 간의 갈등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게다가 시대를 뒤집은 줄만 알았던 종교개혁도 얼마 못가 구호만 남았다. 교리와 지성적 울타리에만 갇혀 균형을 잃고 본질을 잃어간 것은 한계로 지적된다.

그만큼 개혁은 단지 과거에 머무는 사건이 아닌, 지금도 여전히 진행돼야 할 운동성을 지닌다. 그래서 종교개혁가들은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돼야 한다”고 외쳤던 것 아닐까.

그럼에도, 종교개혁 500년의 의미를 되돌아보면 한 가지는 분명하다. 교회가 변하면 분명 개인과 사회도 변했다는 점이다. 그만큼 교회는 영향력이 있다.

자문해보자. 오늘날 개신교는 그 힘이 있는가. 500주년이 남긴 유산과 몫을 감당하지 않는다거나 성찰이 없는 기념은 헛헛한 외침일 뿐이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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