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명량해전 준비 과정을 통해 보는 이순신의 참모습 (하)

통합 리더십의 위대함을 보여준 표본적 교훈
3차원적 병목 저지 지리전
천재적 전략 구상 평가 미흡

9월7일에는 정탐인 임준영으로부터 적선 13척이 어란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는다. 9월9일에는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군사들의 긴장감을 풀어주고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하여 탐라(제주도)에서 기증받은 소 다섯 마리를 잡아 중양절 잔치를 벌여 군사들을 배불리 먹인다.

해전 하루 전인 15일에는 마지막으로 진을 명량을 지나 우수영 앞바다로 옮기고, 장졸들을 모아 놓고 그 유명한 명언으로 군사들의 마지막 결의를 촉구한다.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 (必死則生 必生則死·필사즉생, 필생즉사)’ 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일부당경, 족구천부)’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가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날 밤 꿈에 신인(神人·신령스러운 사람)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고 기록하였으니, 이 꿈으로 인하여 이순신은 승리를 예감하며 확신에 찬 과감한 작전 지휘를 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위에 든 그의 최고 명품 경구인 ‘필사즉생, 필생즉사’를 이순신은 문자 그대로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치열한 혈전을 앞두고 부하 장졸들의 결의를 다지고자 내린 군령이었지만, 이 경구는 그 의미와 적용의 폭이 대단히 넓어 오늘의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죽자 살자 열심히 노력하면 뜻을 이룰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실패하게 될 것’이란 뜻으로 널리 쓰고 있음을 교육자들은 알아 둘 일이다.

드디어 결전의 날 9월16일 이순신의 일기는 “맑음, 이른 아침에 별망군(관찰병)이 와서 보고 하기를 ‘적선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명량을 거쳐 곧장 진지를 향해 온다’고 했다.”라고 쓰고 있다. 여기에서 밑줄 친 부분을 주목해 보면 ‘명량 수로를 통과하여 이순신이 진 치고 있는 물결이 잔잔한 우수영 앞바다에서 해전이 벌어졌다’는 뜻으로 명량의 거친 물결과 소용돌이를 이용하여 적을 격파한 듯이 기술한 종래의 작품과 영상물이 허구임을 말하고 있다. (참조: 해군사관학교 명량해전도)

이순신도 곧바로 13척의 판옥선단을 이끌고 맨 앞장서 133척의 일본함대를 맞이했으나 어제의 다짐과는 달리 이순신의 기함 혼자서 130여 척의 적선에 둘러싸여 집중 공격을 받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다른 판옥선들은 칠천량 참패로 공포감을 미처 이기지 못한 데다 열 배가 넘는 적선을 보니 기가 질려 물결에 할 수 없이 떠밀려 간 듯이 멀찍이 뒤처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가장 염려했던 병사들의 사기가 살아나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한 시간쯤 혼자서 맹렬히 독전하던 이순신은 적에게 공격 기회를 주게 될까 봐 뱃머리를 돌려 부르러 갈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초요기라는 깃발을 흔들어 오라는 신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다가온 중군장 김응함과 거제 현령 안위에게 “너희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당장 처형하고 싶으나 또한 적의 형세가 급하니 우선 공을 세우게 해 주마”하니, 그들도 마음이 급하여 앞으로 돌진하였으나 곧 적에 포위당하여 이순신 기함이 달려가 구해 준다.

뒤에 처진 다른 판옥선들도 이순신 기함 혼자서도 맹렬한 화력으로 잘 버텨 내는 것을 보고는 자신감을 얻어 연달아 달려와 돌진한다. 이때 이순신의 기함에 타고 있던 안골포(진해) 해전 때 투항해 온 일본인 병사 준사가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바다에 떠 있는 일본 장수의 시체를 가리키며 “마다시(馬多時), 마다시” 소리치는 것이었다. 마다시란 전의 안골포 해전 때 조선군의 공격으로 전사한 일본 장수 구루시마 미치유키의 동생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의 별명으로 형의 원수를 갚겠다고 선봉장이 되었으나 동생 또한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이순신은 즉시 군사들에게 명하여 갈고리로 그 시체를 건져 올려 적군들이 보는 앞에서 시체를 토막 내게 하니 이 광경을 본 적들의 기세가 꺾이고, 그 틈을 타 맹공을 퍼붓자 적들은 전의를 잃고 31척의 함선만 격파당한 채 후퇴했다. 이로써 이순신은 불가사의의 부활전을 승리로 마감하여 꺼져가는 조선의 운명을 또다시 구해 낸다. 구루시마 형제는 원래 해적 출신 형제 수군 장수로 조선의 해안을 약탈하던 왜구 우두머리였던 셈인데, 형제가 나란히 조선 수군에 처참한 모습으로 죽었으니 지은 죄에 따른 인과응보라고나 할까?

한편, 이순신은 하루 전 장병들을 독려하며 전했던 그의 명언 ‘필사즉생’을 몸소 실천하여 어렵게만 보이던 승리를 달성하는 살아 있는 교훈을 역사에 길이 남긴 셈이다. 또 다른 경구 ‘일부당경’은 명량해전 42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때 이순신이 구상한 비상한 전략, 3차원적 병목(Battle neck) 저지 지리전 개념을 겨우 2차원 평면적 명량해협의 폭으로 부족한 해석을 내리지 않았나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순신이 폭이 좁은 명량해협(현재 진도대교가 있는 지역)을 해전지로 택한 이유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조선 수군의 약점을 지리적 특성으로 보완하는 이른바 지리전 개념에서이다. 바꾸어 말하면 적선이 수백 척이라 하더라도 폭이 불과 300여 미터인 해협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한 줄 또는 두 줄로 서서 차례대로 항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목을 지키고 있는 막강 화력의 조선 판옥선이 통과해 나오는 대로 격파해 버리면 승산이 있다는 구상이었다.

여기까지는 지금까지의 이순신 연구가들이 모두 공감을 하는 바이지만 명량해협이 폭만 좁은 것이 아니라 수심이 1.9 미터밖에 되지 않아 배 밑이 V 자 형인 일본 선박의 통과가 어렵다는 이순신의 입체적(폭과 깊이) 저지 개념을 완전히 해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유는 해전 직전 일본 선단 200 척이 명량 입구까지는 도착하였지만, 이순신의 일기대로 명량을 통과해 참전한 일본 선박은 133척에 불과했고, 이들은 모두 크기가 작고 전투력이 약한 협선뿐이었다. 막상 전투력이 강한 일본 대형 선박인 아다케선 약 70척은 수심이 얕은 명량 수로를 통과할 수 없어 입구에 묶인 채 결과만 기다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어찌 이것이 우연이겠는가? 이순신은 명량의 폭과 깊이 두 방향의 입체적 병목현상을 비상한 전술로 구상하고 그렇게 성공하였지만, 자기 자랑을 극히 삼가는 겸손한 분이어서 이 구상을 일기에 기록하지 않은 연고로 우둔한 후손들이 이순신의 천재적 전략 구상을 절반 이하로 깎아내려 평가했다는 죄스러움이 앞선다.

마지막으로, 아무도 승리를 기대할 수 없었던 절대 열세의 명량해전을 대첩으로 이끈 총체적 승리 요인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한마디로 그 승리 요인은 군·관과 지역 국민의 절대적 신임과 존경을 받는 통제사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통합적 국민 총력전이라고 할 수 있다.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이 통제사로 복귀했다는 소식에 숨어 지내던 백전 경험의 옛 부하 장졸들이 자진해서 속속 복귀하여, 판옥선은 13척뿐인데 오히려 노련한 장병들이 충분하여 판옥선 당 인적 전투력은 패전 이전을 능가했다. 더하여 절에 있던 승려들이 다수 의승군으로 참전하여 힘을 더했다.

10월 하순의 바닷바람은 추위를 더하여 먹을 식량과 추위를 막을 의복이 문제였으나 이는 살 곳을 찾아 이순신 진영으로 모여든 이삼백 척의 피난 선단이 통제사가 없으면 우리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자각으로 자진해서 식량을 거두어 먹이고 옷을 주어 입혔으니 명량해전의 이순신 수군은 거지군대였다.

결론적으로 명량해전은 하나의 위대한 지도자와 통합의 리더십이 얼마나 큰일을 해낼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 표본적 교훈이라 할 것이다. (끝)

이내원/재미 이순신 교육운동가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