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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한인 3명이 최초로 리버사이드교회 등록

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
도산 공화국(9)

첫 신자들 대부분 원래 기독교인
평양 출신 대다수 평양교회 다녀

한국어 유창한 마페트 목사가
미주에서 첫 한국어 설교 제공
◆한인 장로 선교회


도산은 기독교인으로서 민주주의 절차에 따른 공동체를 파차파 캠프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한인들은 리버사이드에 도착한 직후 리버사이드 장로교회 소속으로 한인 장로 선교회를 설립하고 예배를 드렸고 동시에 성경 공부와 영어 공부도 함께 했다.

평양에서 선교사로 일했던 새뮤얼 마페트 목사가 리버사이드 장로교회와 파차파 캠프 한인들 간의 가교 역할을 해서 한인 장로 선교회가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페트 목사가 브라운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 "현재 리버사이드에 약 30여 명의 한인 기독교인들이 있는데 이미 현지 장로교회와 관계를 맺고 있고 우리에게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고 했다.

마페트 목사는 브라운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미스터 방이 LA, 리버사이드, 패서디나를 방문했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미스터 방은 방화중 목사로,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장로를 역임한 인물이자 방기창 목사의 아들이다. 방기창 목사는 1907년에 평양 한인 장로회에서 안수를 받고 최초의 목사가 된 일곱 명 가운데 한 명이다.

차의석은 자신의 자서전 '금산'에서 하와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직 후 주일 예배를 주도한 방화중 장로를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방 형제가 주일 예배를 주도했는데 찬송가, 기도, 설교를 모두 한국어로 했다. 나에게는 매우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그 이유는 그날이 미국 본토에서 처음으로 예배에 참석한 날이었고 무엇보다도 한국에서 알고 지내던 분들과 다른 한국인들과 함께 선교사들의 나라 미국에서 한국어로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다."

이 진술은 초기 한인 사회에서 한인 교회가 매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에서도 한인 교회는 매우 중요하고 큰 역할을 담당했다.

평양에서 선교 활동을 활발히 전개한 새뮤얼 마페트 목사와 리버사이드 한인 장로 선교회 설립 관계는 리버사이드 갈보리 장로교회에서 발굴된 '한국인 명단'에서도 그 맥락을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한국인 명단에 등록되어 있는 상당수의 교인들이 평양에서 이미 기독교인이었다"고 쓰여 있다.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에 온 평양 출신의 한인들 중 대다수는 이미 평양에서 교회를 다녔던 것이다.

차의석은 자신의 자서전 '금산'에서 평양에서 마페트 목사를 만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한 명의 여성과 두 명의 남성이 있었는데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아마 여성은 미시즈 리인 듯하였다. 금발의 남성은 웰스 박사이고 다른 남성은 마(마페트) 목사였다. 마 목사는 키가 크고 말랐으며, 젊어 보였으며, 미남이었다. 그는 콧수염을 길렀고 머리카락은 갈색, 눈은 파란색이었다. 그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잘했다."

마페트 목사는 유창한 한국어로 설교를 하면서 평양의 한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차의석은 자신이 미국에 오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는 언젠가는 미국에 가길 원했다. 그리고 선교사가 되어 나의 조국인 한국에 돌아오길 희망했다."

리버사이드 데일리 프레스 신문도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들에 대해 보도했다.

"한국에서의 선교 활동. '언어를 배우기 힘들고 사람들은 보수적이다. 그러나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데 호의적이라 놀랍다.' 이것은 한국에서 9년 동안 선교사로 활동했던 왐볼드 여사가 리버사이드 장로교회 여선교회에서 오후에 발표한 내용이다."

한인들이 따로 모여 예배를 드렸던 리버사이드 갈보리 장로교회(Calvary Presbyterian Church) 소속의 한인 장로 선교회의 명단도 발굴되었다. 1905년 6월 29일 최초로 박선규, 김중삼, 오진국 등 3명의 한인들이 교회에 등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7월 2일에는 정재관이 등록했다.

1906년 4월 1일에 5명이 등록했고, 1907년 1월 3일에 5명, 그리고 1907년 4월 28일에는 22명이 대거 등록했는데 모두 한국 평양에서 이미 기독교인으로 등록했던 것으로 적혀 있다. 1920년 6월 19일까지 약 50여 명의 한인들이 한인 장로 선교회에 등록했다. 다른 교회로 이적한 5명의 이름도 같은 기록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1918년 미 장로교 연례 보고서 178쪽에서는 "리버사이드 한인 미션은 다른 곳과는 달리 여성들과 자녀들이 함께 예배를 드린다"고 적혀 있다. 즉 이것은 리버사이드는 미혼 남성 중심의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가족 중심의 한인타운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직접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1907년 윌리암 멕그이간(William Mec grigyan)이 출판한 책(책 제목 미상)에서도 한인 미션에 대해 적고 있는데 "젊은이들이 한인들에게 일주일에 3번 영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리버사이드 엔터프라이즈' 신문도 한인 미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설립된 지 약 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약 50~60명 정도의 교인들이 아주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이미 한국에서 기독교인이었던 사람들이다. 갈보리 교회의 젊은이들이 거의 매일 한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또 다른 신문인 '리버사이드 데일리 프레스' 1906년 1월 8일자 보도에도 "한인 세례. 갈보리 교회에서 어제 오전 알레스 이어킨 목사가 언씨 부부의 갓난아이 팀 정호에게 세례를 했다. 언씨는 교육받은 사람으로 현재 리버사이드 한인 장로 선교회를 책임지고 있다. 약 50여 명의 청소년들이 교회와 주일학교를 다니고 있다"라고 나와 있다.

1909년 10월 24일 리버사이드 갈보리 장로교회 주보에 한인 선교회와 스패니시 선교회의 예배가 이 교회의 정식 예배로 인정받고 있는 기록도 발견되었다. 한인 선교회의 주소는 1532 파차파 애비뉴(Pachappa Avenue)이고, 스패니시 선교회는 230 8가(Eighth Street)이다.

리버사이드 갈보리 장로교회 창립 25주년 주보에도 여전히 한인 선교회가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적혀 있다. 1914년 12월 6일 주보에 한인 선교회 담당 목사 이름이 S. H. Kim으로 적혀 있다.

추후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그의 한국 이름은 김순학이다. 그는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의 주요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런데 1918년 11월 17일자 주보에는 한인 선교회 또는 스패니시 선교회에 대한 부분이 빠져 있다. 주보의 형식이 통째로 바뀌었는데 그 이후 리버사이드 갈보리 장로교회 주보에는 한인 선교회와 스패니시 선교회에 대한 언급이 없다.

따라서 1905년에 설립된 리버사이드 한인 장로 선교회는 도산 안창호가 1913년 LA로 이주한 이후에도 1918년까지는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13년에 한파로 일부 사람들이 타 지역으로 이주했고 리버사이드에서도 근처의 바인 스트리트(Vine Street)로 이주한 사람도 있었다.

1918년 11월 대한인국민회 리버사이드 지방회가 근처 바인 스트리트(Vine Street)로 이전하면서 파차파 캠프는 해체되거나 더 이상 한인타운으로서의 활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위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인 선교회는 지속되었다.

초기 한인 사회는 독립운동과 교회 활동,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한인 교회와 독립운동은 따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한인 교회 활동이 곧 독립운동이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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