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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의 상자…국정원장 집무실의 비밀 금고

월 5억원 국정원장 특수활동비
사실상 한도 없는 화수분인 셈
내년 국정원에 4930억원 책정
판공비 빠듯한 관료엔 오아시스
균형감 잡힌 적폐청산이 절실
검은돈 드러내 관행 결별해야


'꼬리표'가 붙지 않은 현찰은 유혹 자체다. 슬쩍 챙겨 써도 좀체 뒤탈이 나지 않는다.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가 그 전형이다. 비밀 보장이 생명인 정보기관의 특성 때문이다. 그 돈이 '적폐의 아성'으로 지목되면서 나락으로 떨어졌다. 공방도 거세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가 국정원 특활비를 챙겨 쓴 건 '뇌물 상납'이란 게 정부·여당의 공세다. 하지만 야권 일각은 물론 상당수 전·현직 고위 인사들은 "그리 볼 일만은 아닌데…"라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야누스의 얼굴을 한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들여다본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모 인사는 부임 첫날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한마디로 "돈의 위력과 달콤함에 완전 제압당하는 아찔한 체험을 하는 순간"이었다고 한다. 정보기관에서 잔뼈가 굵은 보좌진이 귀띔해준 내용은 충격이었다. 첫째는 매월 국정원장이 쓸 수 있는 특수활동비가 5억원(연간 60억원) 수준이라는 점, 둘째는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혹여 그 돈을 다 써버려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설명이었다. 실무부서의 특수활동비 등으로 얼마든지 충당해 놓을 테니 안심하라는 취지였다.

화수분은 원장실에 놓인 육중한 금고였다. 국정원 수표는 물론 현찰과 달러·엔화 등이 정갈하게 쌓여 있었다. 첫 용처는 어디였을까. 이 인사는 "역시나 전관예우가 중요했다"고 말했다. 바로 앞서 원장을 지낸 전임자와 식사 자리를 만들어 깍듯한 예의를 표한 뒤 거액의 금일봉으로 성의를 전달했다. "전관(前官)이 대통령 독대 보고 때의 노하우나 인수인계 사항을 제대로 풀(pool)해 주지 않으면 난감한 일을 겪게 될 것"이란 보좌진의 조언에 따른 조치였다.



각각 1억원대를 조금 넘는 월급이나 법인카드는 그야말로 '새 발의 피'였다. 이 금고 속 돈을 어떻게 다 쓰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란 걸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당 사무총장급 중진 의원이 취임 축하 식사를 하자고 연락이 왔다. 약속에 맞춰 나가려는 그에게 비서진은 쇼핑백 하나를 가져왔다. 수천만원의 현금과 해당 의원의 지역구 정보가 담긴 자료였다. 의아해하는 원장에게 "다 이렇게 하시는 겁니다"란 보좌진의 귀엣말이 들려왔다.

놀라운 건 야당 의원과의 만남 때도 돈봉투와 정보 자료가 준비됐다는 점이었다. 황당해하자 마찬가지 답이 돌아왔다. 이 인사는 "돈으로 완전히 원장의 혼을 빼놓으려는 것 같았다"며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여기서 내 공직 인생은 끝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말했다. 몇 달 지나면서 5억원을 몽땅 쓰기보다는 절반 정도는 남겨 청와대와 검찰·경찰 등 유관 부서 핵심 라인에 뿌려 주는 게 관행이자 미덕이란 것도 깨닫게 됐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가 내년 예산안에 반영한 국정원 특수활동비는 4930억8400만원이다. 국정원을 제외한 청와대 비서실 등 정부 19개 기관의 특수활동비 총액이 3289억원인 데 비하면 큰 비중이다. 국정원 예산은 철저히 비밀에 싸여 있다. 과거 한 현직 국정원장이 사석에서 "요원 8000명에 예산이 1조원쯤 된다"고 발설했다가 곤경에 처한 적이 있다. 이를 토대로 한다 해도 정규 예산의 절반 수준인 특수활동비가 별도로 책정된 셈이다.

국정원 특수활동비는 관료 사회의 오아시스 역할을 하기도 한다. 장관급 인사들의 빠듯한 판공비를 충당해 주는 산소호흡기와 같다는 말도 나온다. 통일부의 경우 김영삼 정부 초대 한완상 장관이 "안기부(국정원 전신) 돈을 안 받겠다"며 없애버리는 바람에 후임 장관들이 애를 먹었다. 중앙정보부 북한국장 출신으로 김대중 정부 초대 강인덕 장관이 "정보비 도움 없이 어떻게 일을 하느냐"고 DJ에 건의해 겨우 환원시켰다는 게 당국자의 전언이다.

꿀 빨아먹듯 달달하던 국정원 특수활동비가 임자를 만났다. 문재인 정부가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국정원 적폐를 정조준하며 칼날을 들이대면서다. 실국장급 인사들이 '국고 손실'이란 죄목에 엮여 줄줄이 구속됐다. 특수활동비 중 일부가 박근혜 정부 실세 청와대 비서관인 이재만·안봉근씨에게 '상납'됐다는 검찰 수사까지 이어져 논란이 불거졌다. '뇌물'이냐 '통치자금'이냐 하는 날 선 공방이다.

권력 실세들이 납득할 만한 이유 없이 정보기관 현찰 예산을 끌어다 착복했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관행적으로 이뤄져 왔다는 방어 논리도 '불법의 평등'까지 보장하기 어렵다는 차원에서 보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교통단속에 걸려놓고 "왜 다른 사람들도 위반하는데 나만 잡느냐"고 항변하는 꼴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건 적폐의 진앙으로 부상한 국정원의 태도다. 국민과 국가 앞에 석고대죄의 심정으로 회초리 맞을 채비를 해야 하지만 그런 자성의 분위기는 없다. 환골탈태의 결의도 보이지 않는다. 새로 수뇌부에 포진한 인사들은 아닌 보살하며 칼자루 잡기에 바쁘다. 서슬 퍼런 권력의 눈치만 보다 또 다른 적폐를 쌓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제 공개된 국정원 개혁위 '적폐청산 테스크포스(TF)'의 조사 결과 보고서는 이런 우려를 깊게 한다. 우선 발표 시점의 문제다. 국정원은 오후 8시 언론에 보도자료를 돌렸다. 국정원 법률보좌관으로 파견됐던 변모 서울고검 검사가 댓글사건 연루 의혹을 받자 억울함을 호소하며 투신해 숨진 지 불과 4시간이 지난 때다. 유족과 검찰 동료들의 비통함이 빈소에 가득 차던 시간 국정원은 적폐 파헤치기 성과를 알리고,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는 무리수를 뒀다.

조사 내용도 마찬가지다. 2013년 6월엔 "국정원장이 비밀 등급 재분류 권한이 있어 공개 결정이 적법하다"며 '2007년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을 꺼내놓았다. 이번에는 비밀 엄수 위반이라며 수사를 의뢰하는 오락가락 행보다. 국민을 우습게 보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6건의 조사 대상 모두가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겨냥했다는 점도 그렇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의 4억5000만 달러 대북 비밀 송금에 국정원이 환전소 역할을 하고, 요원들을 동원해 차명계좌를 만들도록 한 적폐의 진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대목이 많다. 좌우 적폐의 균형 있는 청산이 이뤄지지 않으면 국민 공감을 얻을 수 없다. 당시 대북라인의 한 축을 맡은 서훈 원장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특수활동비 논란도 마찬가지다.

먼저 원장을 비롯한 핵심 간부와 각 실무부서가 어디에, 어떻게 특수활동비를 집행했는지를 규명해 문제를 바로잡는 게 바람직하다. 조직이 만신창이가 되고 국민 혈세를 도둑질했다는 비난까지 받는 국가정보기관이 숨을 곳은 없다. 이제부터라도 관행과 불법을 구분해 새 틀을 짜야 한다. 판도라의 상자는 열려야 한다.

이영종·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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