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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창] '안물안궁' 시대의 노인들

#. 세종대왕은 한글만 창제한 게 아니다. 효성이 지극했던 만큼 노인들에게도 극진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그런 기록이 수없이 나온다.

"100세가 된 노인은 세상에 드문 일이니 마땅히 먼저 불쌍히 여겨 보호해야 할 것이다…매년 쌀 10석을 지급하고 매월 술과 고기를 보내 주어라" (세종17년 1월 22일자).

90세가 넘으면 양인이라도 새로 벼슬을 내렸으며 천인은 천민 신분을 면하게 해 주었다. 또 80세 이상 노인들을 위해 매년 음력 8월 중 길일을 택해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었다. 한 번은 승정원에서 신분이 낮은 노인은 부르지 말 것을 주청했지만 세종은 "양로는 노인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지 높고 낮음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종들까지 잔치에 참석하게 했다. 게다가 노인들이 들어와 자리에 앉을 때까지 일어서서 그들을 맞기까지 했다 (세종 14년 8월 27일자). 이런 풍경을 보고 사관은 "노인들이 취하고 배불러서…돌아가니 태평시대의 거룩한 일이었다"고 기록했다

임금이 솔선수범하니 노인 공경은 일반 백성들에게도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안 그래도 조선은 장유유서의 유교적 질서가 근간인 나라였다. 아침 저녁 문안은 기본이고 연장자들에게 무례한 이는 아예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부모가 70세를 넘기면 시정(侍丁)이라 하여 아들의 군역을 면해주는 제도도 있었다. 아들이 없으면 손자가, 친손자가 없으면 외손자가, 그것도 없으면 조카로 하여금 연로한 노인을 보살피게 했다.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노인 공경은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가 이젠 아득한 전설이 되어버렸다.

#. 얼마 전 미국을 방문한 조카에게서 요즘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 '안물안궁'이란 말이 유행이라는 말을 들었다. "안 물어봤거든요, 안 궁금하거든요"의 준말로 나이 든 사람이 별 관심도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 또는 구하지도 않은 충고를 해댈 때 젊은이들이 대놓고 하는 소리라는 것이다.

내심 뜨끔했다. 나만 해도 나보다 어린 사람들을 만나면 습관적으로 이런 저런 잔소리나 아는 소리를 늘어놓을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떻게 면전에서 그럴 수 있을까 했다. 하지만 조카는 단호했다. "경로사상, 한국에 더 이상 그런 거 없어요. 버스나 지하철 자리 양보도 잘 안 해요. 자기네도 피곤하고 힘들다는데요 뭐."

하긴 최근 언론 기사를 봐도 노인들이 겪는 차별과 홀대는 차치하고라도 일상에서 당하는 언어폭력도 민망할 정도다. 대중교통 운전기사들로부터 "집에나 있지 왜 나돌아 다녀요?"라는 핀잔을 곧잘 듣는다. 병원을 가도 "그 나이엔 원래 아파요"라는 씁쓸한 소리를 듣기 일쑤란다.

한 사회의 문명 수준은 노인 대접의 수준에 달렸다는데 어쩌다 한국이 이 지경이 됐을까. 한편으론 자업자득이라는 생각도 든다. 세상 달라지는 줄 모르고 여전히 자기 경험만 최고이고 자기 방식만 옳다고 여기는 꽉 막힌 노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거기다 성장 발전이면 모든 게 용서되는 시대를 살아온 영향도 무시 못 할 듯싶다. 자식은 오냐오냐 키웠고 공부 잘하고 경쟁에서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모든 것을 받아줬다. 능률과 효율이란 이름으로 탈법과 편법을 묵인하기도 했다. 그런 것만 보고 자란 젊은이들이 무엇이 중한지, 노인공경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노인이 공경 받지 못하는 사회는 젊은이의 미래도 없다. 그러기에 지금이라도 교육을 다시 세워야 한다. 영어 한 마디 잘 말하고 수학 문제 하나 더 잘 풀게 하는 게 교육이 아니다. 그 전에 먼저 덕(德)과 예(禮)를 아는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 그게 나라가 할 일이고 거기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는 게 지금 노년 세대가 할 일이다.


이종호 OC본부장 lee.jongho@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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