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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악한 노동자들로 생활하며 공동체 지켜

[LA중앙일보] 발행 2017/12/18 미주판 8면 기사입력 2017/12/17 16:18

도산 공화국(13) 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

 파차파에 거주했던 한인들은 다양한 능력과 역할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직업은 농장 노동자였다. 사진은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 근처에 루비도 산에 오른 한인들의 낡은 기념사진들이다.

파차파에 거주했던 한인들은 다양한 능력과 역할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직업은 농장 노동자였다. 사진은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 근처에 루비도 산에 오른 한인들의 낡은 기념사진들이다.

도산 안창호 리더십으로
처음부터 엄격한 규율로
질서있는 자율공동체 이뤄

파차파 캠프 한인들은 주로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느 농장에서 일했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다만 코넬리어스 럼지 소유의 알타 비스타 농장에서 안창호와 한인들이 일을 했고 전낙청의 경우 운이 좋아 리버사이드 서쪽의 글렌 아이본 지역에서 한 치과의사 소유의 농장에서 일했다는 기록이 있다.

리버사이드는 한인타운으로서 중심지 역할을 했지만 농장의 수확 시즌에 따라 한인 노동자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리버사이드로 돌아오곤 했다. 근처의 업랜드, 레드랜즈, 랜초쿠카몽가 등에서 포도, 복숭아, 살구 등을 수확하는 일에 종사했다. 일부 한인들은 농사로 돈을 저축한 후 토지를 구입하여 농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신한민보'는 1910년 11월 16일자 보도에서 "이치완 씨의 신가택. 레드랜드 이치완 씨는 1400원을 주고 170 웨스트 새크라멘토 스트리트에 새로 가옥을 매득하여 가족을 안접하였다더라"라고 보도했는데 이치완은 리버사이드 평의원으로도 활동했던 인물이다.

엘렌 전은 자신의 글에서 자신의 아버지와 가족들이 하와이에서 남가주로 이주한 후 리버사이드에 정착하기 전에는 샌버나디노 사막에서 철도를 놓는 작업을 했다고 기록을 남겼다. 또한 여성들과 일부 남성들은 부유한 백인 가정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한인들은 당시 최고의 호텔이었던 글렌우드 호텔에서 버스 보이 또는 베이커로 일했다는 기록들이 있다. 차의석은 자서전 '금산'에서 "처음에는 리버사이드 글렌우드 호텔에서 버스 보이로 일하였다. 거기에서 일을 배워 나중에는 다른 지역의 여러 호텔에서 버스 보이로 일했고 전문가가 되었다"고 적었다. 파차파 캠프 한인들은 백인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열악한 환경에서 한인타운을 형성했다. 그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과 노력을 다하였고 동시에 노동자로서 생계를 유지하면서 공동체 생활을 했다.

'공립신보'는 "회장은 차정석, 서기는 리응호, 그리고 회계는 전낙청, 경찰은 김기만, 사찰은 한국슴"이라고 보도했다. 이것은 파차파 캠프는 도산 안창호의 리더십으로 처음부터 엄격한 규율을 만들어 질서를 유지하는 자율 공동체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고 있다. 김기만은 1906년 4월 1일 한인 장로 선교회에 가입하여 주로 리버사이드에서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신문에서 특히 '경찰 김기만'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자주 보인다.

정재관(1880~1930)도 초기 파차파 캠프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1903년 11월 2일에 코리아 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를 경유하여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정재관은 부산 출신으로 하와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는데 정확히 언제 이주했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그는 1907년 미국에서 '공립신보'의 주필 겸 공립협회 총회장에 선출되어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을 개시하였다.

이선주의 논문 '리버사이드에서의 도산 안창호의 활동' 138쪽에 따르면 정재관은 도산 안창호가 1904년 3월 23일 리버사이드에 도착했을 때 이강과 함께 마중을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강과 함께 도산을 도와 친목회를 한인공립협회로 발전시키고 미국 최초의 한인 타운인 파차파 캠프를 건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정재관은 1905년 7월 2일 한인 장로 선교회에 가입했다. 1908년 3월, 미국인 친일 외교고문 스티븐스(D.W. Stevens)의 "일본의 한국 지배는 불가피하며 많은 한국인이 일본의 지배를 환영하고 문화도 발전하고 있다"는 등 일본의 한국 지배를 정당화하는 발언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이에 최유섭.문양목.이학현 등과 같이 스티븐스를 방문, 친일적인 발언을 꾸짖으며, 사과, 정정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스티븐스가 오히려 무례한 태도를 보이자 주먹으로 구타하여 응징하였다.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사살도 이 같은 응징 조처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정재관은 1909년 공립협회와 합성협회를 통합해 북미 대한인국민회를 결성하고 회장을 역임하였다. 1912년 3월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종호와 러시아 관청의 허가를 얻어 권업회를 조직하고, 그 총본부를 신한촌에 두고 연추.쌍성을 왕래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 뒤 다시 미국으로 건너와 대한인국민회에 관계하며 항일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한국에서 1963년 대통령 표창,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임준기도 초기 파차파 캠프의 중요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임준기는 1880년 9월 16일에 태어났고 파차파 캠프 설립 초기에 노동 알선사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초안 등록 카드(World War I Draft Registration Card, 1917~1918)'에 의하면 임준기는 당시 샌버나디노(San Bernardino) 코너 에이 스트리트와 식스 애버뉴(Corner A Street and Sixth Avenue)가 교차하는 길 근처에 거주했다. 그의 가족으로는 임광명이 있다.

엘렌 전은 임준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미시즈 임은 남편 임준기와 함께 지내는 것에 신경을 썼다. 임준기는 1903년 샌프란시스코에 혼자 와서 안창호와 합류했는데 그것은 안창호가 그에게 혼자 오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기 때문이다. 부인과 가족이 함께 미국에 오면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되어 미국의 사회와 정치에 관한 공부를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조언이었다. 또한 영어도 빨리 배울 수 없기 때문에 공부가 늦어지고 조국으로 돌아가는 시간도 길어진다는 충고였다. 그러나 그러한 조언을 한 안창호는 이미 결혼해서 가족과 같이 미국에 와 있었다.

한편, 1901년 임준기가 홀로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 미시즈 임은 갓난아이를 돌보느라 남편과 함께 사는 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곧 아들이 생겼고 임준기는 자녀들은 엄마와 함께 성장해야 한다고 하면서 홀로 미국으로 갔다. 미시즈 임의 시어머니는 손자가 서양식 천연두 예방 접종을 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결국 미시즈 임의 아들은 천연두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다. 그후 미시즈 임의 마음이 변하여 자신도 미국으로 갈 것을 결심하고 열심히 바느질을 하여 미국으로 갈 여비를 마련했다. 미시즈 임이 도착하자 임준기는 그가 오렌지 농장의 노동자로 일하고 있던 파차파 캠프로 그녀를 보냈다. 그곳에는 안창호 부인 이혜련 여사가 이미 거주하고 있었다.

어느 날 임준기가 오렌지를 따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미시즈 임은 딸 마조리에게 임씨 일가는 명문 가문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고향에서 임씨 가족은 '진사'로 노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리버사이드에서 오렌지 따는 노동을 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했다."

김영일은 1906년 10월에는 LA통신위원이었다. 1907년 4월 28일에 한인 장로 선교회에 가입했고 5월에는 리버사이드 지방회 대리 회장을 지냈다. '공립신보' 1907년 2월 20일자 신문 4면 '하변학무보고'에서 "하변회 보고. 리버사이드 지방회 부회장 김영일 씨의 보고를 의거한 즉 본월 2일 통상회에 박재윤 리응호 양 씨가 새로 입회하였고"라고 보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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