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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교차로] 묵은 때를 벗기며

이기희 / 윈드화랑대표·작가

한국 가면 제일 먼저 하고싶은 게 때 벗기는 일이다. 때미는 분에게 "때가 너무 많아서…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먼저 양해를 구해야한다. 정말이지 민망할 정도로 국수처럼 때가 밀린다. 그 때마다 참새샤워 하는 걸 눈치챘는지 때밀이 아줌마가 물어 보는 말 "미국에서 오셨죠?" 몸에 낀 때도 국적이 있나?

이스탄불에 갔을 때도 때 빼고 광냈다. 공동 목욕탕에서 몸 불린 뒤 딸하고 한 팀이 돼서 들어갔는데 에그머니나! 가슴에 털난 터번 쓴 중동 남자가 버티고 서 있지 않는가. 둘 중 한 사람은 그 남자에게 몸을 맡겨야 할 판국, 얼떨결에 딸을 남자 앞으로 밀치는 실수(?)를 저질렀다. 급하면 자식도 잊어버린다. 이 일로 싸가지 엄마라고 구박 받으며 여행 내내 딸에게 적잖게 뜯기는 신세가 됐다.

목욕탕 하면 로마다. 로마 목욕탕 유적지는 웅장했던 규모에 비해 원형이 많이 훼손돼 있었다. 반면에 폼베이의 포로이 공중 목욕탕(Forum Baths)은 원형을 그대로 보존 하고 있어 멈춘 역사의 시계를 보는 듯 했다. 서기 79년 베수비우스 화산의 거대한 폭발로 화산 쇄설물이 덥쳐 1700년 동안 잿더미에 파묻혀 있던 신화의 도시 폼베이. 포로이 공중 목욕탕(Forum Baths)은 둥근 지붕과 탈의실, 선명하게 채색된 프레스코화가 사라진 어제를 기억한다. 자연 채광창 지붕을 아치형으로 만들고 벽에 가로로 일정 간격의 홈을 파놓아 천장의 물이 사람들의 머리에 떨어지지 않고 바닥으로 흘러내리게 설계했다. 목욕은 로마인에게 행복과 쾌락을 위한 가장 중요한 행위였다. 기원전 33년에 율리아 수로가 건설돼 귀하던 물이 풍부해지자 공중목욕탕이 폭발적로 번창했는데 황금기 로마에는 11개의 제국 목욕탕과 926개의 공중목욕탕이 생겨났다. 디오크레티아누스 황제는 수천 명을 수용할 대형 공중목욕탕에 휴게실.상점.도서실.체력 단련실.미술관 등 꿈의 궁전을 만들었지만 사치와 퇴폐적인 목욕문화 때문에 로마가 망했다는 말이 나올 만큼 공중목욕탕은 비윤리적인 성문화의 산실로 추락했다.

어릴 적엔 동네 목욕탕에 가서 엄마가 때를 벗겨줬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등을 돌리면 서로 때를 밀어줬다.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동네목욕탕은 그 시절 정을 쌓고 주고받는 사람 향기 넘치는 곳이다. '목욕을 같이한 사이'는 알몸도 스스럼없이 보여줄 만큼 친한 사이라는 뜻이다. 묵은 내 때를 벗기고 엄마까지 목욕을 끝내려면 족히 두 시간은 걸린다. 증기가 뽀얀 공중탕에서 보는 여인들의 모습은 르노와르 그림에서 보는 여자들 처럼 풍만하고 아름다웠다. 목욕을 마치고 옆차기를 하며 집으로 가는 길은 하늘을 날 듯 기뻤다. 달빛에 비친 엄마의 소복은 푸르렀고 빨갛게 젖은 내 뺨은 목숭아처럼 붉고 탐스러웠다.



지금은 아무도 내 등을 밀어주지 않는다. 이태리 타올로 혼자 대충 문지른다. 몸의 때는 비누칠해 벗기는데 마음 속 켜켜이 쌓인 때는 무엇으로 씻어낼까. 로마의 멸망은 목욕문화의 타락이 아니라 그 문화에 젖어 망가진 로마시민의 썩어버린 정신 때문이다. 몸이 썩으면 정신도 부패한다. 한 해 동안 켜켜히 쌓인 삶의 묵은 때를 조금씩 벗기면 마음이 깨끗해지고 좀 홀가분해 지지 않을까.

시끌벅쩍 화려한 성탄절 대신 소박한 내 목욕탕에서 더운 물로 묵은 때를 벗기며 성탄전야를 보낼 생각을 한다. 욕조에 붉은 장미꽃잎 띄우는건 선택, 촛불은 필수! 당신의 크리스마스도 때 빼고 광내는 아름다운 하루가 되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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