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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주의 인물로 찍힌 도산은 이민국 감시 받아"

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도산 공화국(19)

대질 심문 받았지만 체류 연장 허락
최종 판단 하지 않고 출국까지 파악
귀국선 소노마호 기관고장으로 회항
환송행사 후 샌프란시스코 출발 맞아


1925년 7월22일 샌프란시스코 앤젤 섬 이민국 문서는 안창호에게 체류 연장이 허가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1925년 8월16일부터 6개월간 체류가 연장되어 즉 1926년 2월16일까지 합법적 체류가 가능해진 것이다. 안창호는 1926년 3월 초에 하와이를 떠났는데 그것은 체류 기간이 넘었기 때문에 이민국이 1926년 3월 2일에 도산 안창호를 강제로 추방시킨 것이다. 안창호는 이민국에 체류 연장 허가를 해 준 것에 대해 감사 편지를 보냈다. 이 감사 편지는 흥사단 편지지에 1925년 8월6일자로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의 임시 커미셔너에게 보내졌다.

"내가 신청한 임시 체류 연장을 허락해 준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당신이 보여준 친절과 배려에 깊은 사의를 표명합니다. 아쉽게도 체류 연장 허락 편지가 늦게 도착해서 동부로 가려던 계획은 연기하게 되었습니다."

안창호는 체류 연장 허가를 받은 후 활발한 활동을 지속했는데 '신한민보'는 지속적으로 안창호의 순방활동을 보도했다. '신한민보' 1925년 11월 12일에 '안도산 선생의 북가주 순행'이라는 제목으로 "안도산 선생은 현금 다뉴바와 태프트 등지에 있는 여러 동포들을 심방 중에 있다는데, 불일간에 상항에 도착할 듯하다더라"라고 하였다. 또한 '신한민보' 1926년 2월 4일자 기사에 '안도산 북방 동포 심방 중'이라는 제목으로 도산 안창호가 곧 원동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또 "도산 안창호 선생은 불일간에 원동으로 다시 갈 계획인 바 현금 북가주 몇몇 곳에 거류하는 동포를 심방하는 중이라더라"고 보도했다. 그리고 '신한민보' 1926년 2월 11일자 기사에서는 '안 도산은 태프트를 다녀와서'라는 제목으로 북가주 방문 소식을 알리고 있다.

"도산 안창호 씨가 북방에 순행한다 함은 이미 보도하였거니와, (안창호)씨는 지난 토요일에 상항을 떠나 태프트에 있는 동포들을 심방한 후 나성 본택으로 회환할 예정이라더라."

안창호는 또한 시카고 심문 답변에서도 많은 곳을 방문했다고 밝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LA로 가서 약 2달 머물렀다. LA에서 스톡턴, 새크라멘토, 다뉴브, 리들리, 샌디에이고, 리버사이드, 베이커스필드를 방문했다. 캘리포니아에서 시카고로 향하던 중 덴버에 잠시 체류 후 시카고에 도착했다. 시카고에서 필라델피아, 뉴욕, 코네티컷주의 뉴헤븐, 보스턴, 폴 리버스 (워싱턴 DC), 뉴저지의 패터슨, 다시 뉴욕에 갔다가 시카고에 도착했다."

이민국은 안창호에 대한 대질 심문과 조사를 실시하고 일단 안창호가 신청한 체류 연장을 허락했다. 그러나 안창호가 공산주의자 또는 볼셰비스트인지에 대한 최종 판단은 유보한 상태로 요주의 인물로 분류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미국 이민국은 안창호가 미국 땅을 떠날 때까지 철저히 감시를 했는데 샌프란시스코의 앤젤 섬 이민국은 1926년 2월 6일 (12025/14120) 문서에서 안창호가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는 배에 타는 것을 확인하라고 적혀있다.

문서에는 "안창호는 2월 23일 또는 24일 소노마호(S.S. Sonoma)로 떠날 예정인데 23일인지 24일인지 정확하지 않다. 안창호의 체류 기간은 1926년 2월 16일까지 인데 안창호가 미국을 떠나는 것을 꼭 확인하라"고 적혀있다. 안창호가 소노마호에 승선한 기록에는 필기체로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Continued journey on Sonoma to Australia"(소노마 호를 타고 오스트레일리아로 계속 항해)"

그리고 이 글을 작성한 사람의 사인과 문서 번호도 적혀 있다. 미국 이민국은 도산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소노마 호에 탑승할 때 이미 안창호의 하와이 체류를 불허한 것이다. 1923년 2월23일 샌프란시스코 엔젤 섬 이민국 문서 (12025/14120)은 "안창호가 소노마호를 타고 떠난 것을 확인했다. 사진과 대조해서 확인했다"고 쓰고 있다. 그런데 이 문서 밑에 "1926년 3월2일 소노마로 떠났다. 그리고 이 배는 1926년 2월23일 고장 나서 되돌아 온 적이 있었다"고 적혀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안창호는 원래 하와이에 약 2주 체류하면서 동포들과 만난 후 상해로 갈 예정이었다.

'신한민보'는 안창호가 미국을 떠나는 소식을 전했는데 '신한민보'는 1926년 2월 25일에 '안도산 송별회'라는 제목으로 자세히 송별회 소식을 전하고 있다.

"1년 전에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왔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송별회를 상항 한인 예배당 안에서 22일 저녁에 개최하였는데 그 순서를 대략 소개하자면, 국민회 총회장 백일규 씨의 사회 하에 개회하고 애국가 1, 2절을 병창한 후에 사회자의 간단한 취지 설명이 있고 인하야 리대위 목사의 송별 기도가 있었다. 그리고 여학도 하소정, 김코렌의 병창 창가가 끝나자 사회자의 소개로 정빈 안도산 선생이 등단하여 40분 동안 도도 수천 언의 간곡한 연설을 하야 청중 중에 감정이 연약한 남녀의 눈물을 쏟아내었다. 그 연설의 상편을 필한 후에 황사선 씨의 독창 창가와 황보식 부인의 피아노 화창이 있은 후에 정빈이 연설을 다시 계속하야 약 40분 동안 열정의 권설이 있은 후에 '우리 다시 만날 때'라는 찬미 제 236장을 병창한 뒤에 정빈의 요청으로 애국가 3, 4절을 병창하고 임정구 목사의 기도로 폐회하다. 안도산의 연설 대지는 당신 스스로가 무슨 영웅이 되어서 우리 광복 사업을 하루 이틀에 성취하겠다고 담보는 할 수 없으나 우리 대한 혁명가 중의 한 분자의 자격을 가지고 우리 광복 사업을 위하야 최후의 일각까지 노력할 결심을 가지고 떠나시노라 하며 우리 일반에게 권고하신 말씀은 누구나 자포자기하지 말고 모두 철저한 대한민국의 혁명가야 되자 하였다. 안도산이 기자에게 잠시 전하는 말씀에 의하면 '이번 떠날 때에 태푸트.산타애나.라성.스탁톤.상항 등지를 심방할 시에 사랑의 송별회와 접대와 또한 예물을 많이 받았는데 무엇으로써 보답할는지 참말 알 수 없다' 하더라. 그리고 떠나시며 나중 말씀이 재미 일반 동포들의 건강과 행복을 축사하노라고 하더라."

안도산은 2월 23일 소노마 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하와이로 출발하였다. 김형찬은 안도산이 남가주의 샌페드로 항을 떠나 배가 고장 나서 샌프란시스코로 회항했다고 밝혔으나 소노마 호는 샌프란시스코 항을 떠났다가 고장 나서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회항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신한민보'에서 송별회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성대히 거행됐다고 보도했기 때문에 샌페드로 항에서 출발한 것이 아님이 확인 되었고 또한 소노마 호 승선 기록 (1926년 3월2일)에 의하면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1926년 2월20일 탑승했다고 적혀 있다.

<20회로 계속>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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