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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며칠 전 영국에서 '외로움 담당 장관(Minister for Loneliness)'을 임명했다는 소식이 국내외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처음에는 기사 제목만 흘깃 보고 넘어간지라, 한동안 영국에 '고독부' 같은 정부 부처가 생긴 줄 알았다. 그 부처에서는 이제 무슨 일을 하는 걸까, 혼자 상상하기도 했는데 실체는 내 공상과는 조금 달랐다.

영국 정부조직은 그대로이고, 기존 체육 및 시민사회 장관이 '외로움 담당'이라는 이름의 장관직도 함께 맡기로 했다고 한다. '신임' 장관이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거라는 내용보다는 "외로움 문제가 심각하며, 국가가 이에 맞서겠다"는 선언에 무게가 실린 임명인 듯하다. 영국 언론에 따르면 이제부터 정책개발을 하면서 통계자료도 만들고 관련 시민단체도 지원할 거란다.

외로움 장관이 하필 영국에서 생겼다는 점이 약간 재미있었다. 원래 영국인들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두는 성향으로 알려지지 않았나? 하긴, 정호승 시인은 시 '수선화에게'에서 이렇게 읊지 않았는가.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고. 외로움 앞에 장사 없다.

같은 시에는 이런 시구도 있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영국 장관은 그런 숙명을 상대로 어디까지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사회복지사가 독거노인을 방문하고, 심리상담사가 은둔형 외톨이와 따돌림당하는 학생들을 찾아가고, 마을 자치조직을 활성화하고…. 그다음에는? 편의점에서, 지하철에서, 사거리 인파 속에서 치통처럼 시리게 맛보는 고립감에 대해서는 국가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곧 조금 다른 시각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게 됐다. 대인 접촉이 끊긴 이들이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물질적, 사회적으로 지원하는 일은 물론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듯했다. 삶이 곧 외로움이고 그럼에도 우리 모두 살아가야 한다면, 그만큼 '외로움을 견디는 힘'이 필요하다는 뜻일 테니 말이다.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복작거리며 하루를 보낸 뒤에도 헛헛함에 몸부림치게 되는 것은, 그만큼 '외로움을 견디는 힘'이 소진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 '수선화에게'는 그 답까지 제시하는 것 같다.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더 외로워지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살아갈 용기 역시 함께 얻는다. '울지 마라'는 첫 행보다는 시의 뒷부분 때문이다. 마지막 두 줄은 이렇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지구를 움직이고 음파를 전달하는 어떤 섭리 속에 내가 있다. 그 거대서사에서 나는 소외당하지 않는다. 산그림자가 외롭고, 종소리가 외로운 것처럼 내가 외롭다는 게 바로 그 증거다. 그래서 나는 비록 외로울지라도 내 존재의 의미를 의심하지는 않게 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광장의 섬뜩한 구호들, 포털사이트의 적개심 어린 댓글에서 나는 가끔 진한 외로움을 읽는다. 자기 존재의 의미를 의심하는 이들이 무리에, 거대서사에 소속되고 싶은 마음을 그런 식으로 드러내는 것 아닌가 싶어서다. 외로움을 넘어선 그 공허함이 가엾다.

내가 만약 한국의 외로움 담당 장관이 된다면 전국 도서관에 예산을 지원해 독서토론모임을 지금의 곱절 이상으로 늘리는 데 쓰겠다. 그래서 같은 동네 사람들이 일주일이나 보름에 한 번씩 만나는 자리를 주선하고 싶다. 특히 1인 가구들을 끌어오고 싶다. 그렇게 지역과 지식에 기반을 둔 독서 네트워크를 나라 전체에 촘촘히 짜고 싶다.

책들은 모두 의미로 가득한 세계에 있다. 책을 읽는 동안에 독자는 다양한 의미와 관계를 맺는다. 독서토론 참가자들은 다음 모임을 기다리는 동안 그 서사들 속에서 자기 자리를 발견하고 내면이 서서히 차오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헛된 증오와 인정투쟁의 발버둥 없이도 혼자 선 시간을 더 강인하게 버티게 될 거라 기대한다.

내가 만약 한국의 외로움 담당 총리가 된다면, 교육부, 고용노동부, 보건복지부, 여성가족부 장관을 휘하에 두고 '외로움 재분배 태스크포스팀'을 만들겠다. 우리 사회 어느 구석은 외로워서가 아니라 반대로 너무 부대껴서 탈이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라면, 사람이 될 수 있을 만큼은 각자 외로워질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야근에 시달리는 회사원, 육아에 지친 어머니, 학원 다니느라 바쁜 학생들. 나는 그들을 가슴검은도요새가 지켜보는 물가 갈대숲으로 데려가고 싶다. 때가 되면 산 그림자가 내려오고,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순간 그들이 홀로됨을 벅차게 느끼도록 하고 싶다. 그런 그윽하고 감미로운 고독을 선사하고 싶다.


장강명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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