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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 유럽에서 미국을 보다

안에서 못 보던 것도 떨어져서 보면 더 잘 보일 때가 있다. 미처 몰랐던 나를 발견하고, 내가 사는 곳을 다시 돌아보는데 여행만한 것이 없다. 지난 주 벨기에를 다녀왔다. 잠시 영국서 공부하게 된 아이 핑계로 런던에 간 김에 일부러 짬을 낸 것이다.

벨기에는 경상남북도 크기에 인구 1100만, 1인당 소득 4만 달러가 넘는 강소국이다. 수도 브뤼셀엔 유럽연합(EU) 본부가 있다. 런던서 브뤼셀까지는 초고속 열차 유로스타를 탔다. 250마일이 채 2시간이 안 걸렸다. 역으로 친구가 마중을 나왔다. 직장 일로 파견 나가 있는, 고교와 대학을 함께 다닌 친구다.

뜻밖에도 역 주변은 스산했다. 여기저기 아랍 글자 간판과 이슬람식 할랄 음식점이 낯설었다. 시리아 등지에서 건너온 아랍인들이 크게 늘어 그렇다고 했다. 중동 난민들이 몰려들어 유럽 각국의 고민거리가 되고 있다는 뉴스가 생각났다.

그럼에도 브뤼셀은 활기찼다. 차와 사람들로 북적였고 관광객들의 명랑한 웃음이 넘쳐났다. 중세 성곽 도시 겐트와 항구 도시 앤트워프도 둘러봤다. 가는 곳마다 위풍당당한 가톨릭 성당이 있었고 낭만어린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돌과 벽돌로 지어진 건물들은 고색창연했지만 격조가 넘쳤다. 300년도 안 된 나라임에도 역사와 전통을 훨씬 더 잘 보존하고 있는 것 같아 부러웠다.



브뤼셀 근교 워털루도 인상적이었다. 1815년 나폴레옹의 프랑스군과 영국-네덜란드-독일(프로이센) 연합군 20만 명이 이곳에서 맞붙었다. 나폴레옹 군대는 5만 명 가까이 죽었다. 전쟁이 끝나자 유럽 지도가 바뀌었다. 벨기에라는 나라는 워털루 전투 15년 뒤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면서 생겨났다.

벨기에에 가면 누구나 초콜릿을 고르고 와플을 사 먹는다. 홍합탕과 감자튀김 역시 꼭 먹어봐야 한다는 명물이다. 맥주도 빼놓을 수 없다. 시판되는 것만 1000종이 넘고 맛도 일품이라며 친구는 권주가를 불렀다. '꽃 피자 술 익고 달 밝자 벗이 왔네 /이같이 좋은 때를 어이 그저 보낼 소냐.' 옛 선비 풍류엔 못 미쳐도 우린 매 끼니 '세계적인' 맥주를 곁들여 시절을 이야기했다. 한국과 미국에 대해, 쇠약해 가는 중년의 몸에 대해, 그리고 나라와 개인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사람 사는 곳, 어디든 차별은 있다. 소득과 학벌, 인종과 출신 지역, 종교와 피부색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구분되었던 게 역사다. 많은 이들이 그런 차별에 맞서 싸웠고 지금도 분투하고 있지만 이 땅의 불평등은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 그나마 그런 모순이 조금이나마 극복되고 있는 곳이 북유럽이다, 라는 게 우리의 결론이었다.

벨기에를 포함한 북유럽 선진국들은 소득의 거의 반을 세금으로 낸다. 그 결과가 행복지수 세계 최고, 불평등 지수 세계 최저라는 지금 모습이다. 이는 통제되지 않은 이기심과 탐욕이 활개 치는 나라에선 결코 맛볼 수 없는 '더불어 삶'의 열매라는 데도 우리는 뜻을 같이했다.

런던으로 돌아올 때 다시 유로스타를 탔다. 두 시간 내내 미국을 생각했다. 그 동안은 뭐든지 미국이 세계 최고인 줄 알았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의 그 미국이 아니다. 물론 열심히 일한 만큼 더 많은 보상을 받는다는 미덕은 아직도 그럭저럭 유효하다. 그렇지만 더 이상 자신 있게 아메리칸 드림을 외치기는 어려워졌다. 상위 1%가 전체 소득 증가분의 90% 이상을 가져가는 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유럽을 보러 갔는데 미국을 더 본 것 같다. 열차가 드넓은 프랑스 평원을 지날 즈음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석양빛이 차창으로 몰려들었다. 지는 햇살이지만 눈은 부셨다. 지금의 미국이 꼭 저 해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종호 OC본부장 lee.jongho@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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