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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 유럽에서 미국을 보다(2)

[LA중앙일보] 발행 2018/02/09 미주판 22면 기사입력 2018/02/08 18:49

런던을 다녀온 지 2주가 지났다. 많은 것을 보았지만 기억만으로 붙들어 두기에는 망각의 힘이 너무 센 것 같다. 그나마 더 날아가기 전에 몇 자라도 적어 영국에서의 자취를 남기고자 한다.

듣던 대로 런던 날씨는 매일 흐리거나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그 빗속을 날마다 걸었다. 빨간 2층 버스도 타고 거미줄처럼 얽힌 지하철도 탔다. 영국의 아이콘이 된 런던브리지, 런던타워, 런던아이(eye)를 직접 건너도 보고 올라도 갔다. 위풍당당한 의사당과 수리 중인 빅벤, 장엄한 웨스트민스터 사원, 옛 제국의 영화를 간직한 트라팔가 광장 주변도 배회했다. 모두가 책이나 TV에서 수없이 보고 들었던 곳들이다. 아무리 멋진 곳도 스토리가 없으면 사람들이 찾지 않는다. 런던은 건물 하나, 골목길 하나가 모두 스토리고 콘텐트다. 궂은 날씨임에도 끝없이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이유다. 과거엔 식민지 제국주의로 먹고 살았던 영국이 지금은 그 때 생산한 스토리로 먹고 산다는 게 얄밉지만 부러웠다.

강이 있는 도시는 어디나 넉넉하고 멋스럽다. 세느강 파리, 허드슨강 뉴욕, 그리고 한강의 서울. 템스강을 품은 런던도 마찬가지다. 세우(細雨) 중에 물길을 가르는 유람선이 액자 속 그림 같았다. 탁류 속에 닻을 내린 채 비를 맞고 있는 벨파스트호는 처연했다. 2차 대전 때 활약했고 6.25 한국전에도 참전했던 용맹스런 순양함이었다. 지금은 전쟁기념관으로, 레스토랑으로 재활용되고 있지만 그 신세(?)가 나빠 보이진 않았다. 생애 전반기를 치열하게 살았던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달관의 여유랄까. 우리들 인생 2막도 저 전함처럼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심 한복판에선 유럽연합(EU) 탈퇴 반대를 외치는 시위대를 만났다. 유럽 대륙과는 일정 거리를 두며 늘 '명예로운 고립' 노선을 취해 왔던 것이 섬나라 영국의 역사였다. 2016년 국민투표에서 근소한 차이로 가결된 브렉시트(Brexit, 영국 Britain과 탈퇴 Exit의 합성어)는 그런 전통의 재확인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시위대의 위세는 홀로서기 반대 또한 여전히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몇 백 년 의회 민주 정치를 해 온 나라임에도 국론 통일은 이렇게나 어렵다. 이념 갈등, 세대 갈등, 지역 갈등 심하다고 우리만 자책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흔히 '대영박물관'으로 불리는 브리티시 뮤지엄은 당연히 들러야 할 곳이었다. 전시 규모가 워낙 방대해 십분의 일도 못보고 나왔지만 감동은 다른 어떤 곳보다 생생했다. 그 많은 전시품의 상당수가 약탈 또는 노획한 것들이라는 사실은 그래도 찜찜했다. 그렇게라도 보존됨으로써 인류 전체의 문화유산으로 남게 되었다는 불편한 진실은 그럼에도 받아들여야 했다. 세상 일이란 늘 이런 식이다. 절대 선도 절대 악도 없는. 그래서인지 무엇 하나에만 애 터지게 매달린다는 것이 속절없고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나이 들수록 점점 실감하곤 한다.

OECD 비만율 1위 나라에서 온 여행객에겐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런던 거리엔 '뚱뚱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여자들은 늘씬했고 남자들도 다 배우나 모델 같았다. 결국 무엇을 먹는냐, 어떻게 먹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국민의 반이 고도비만을 걱정해야 하는 나라 미국이 영국에서 당장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이런 쪽이 아닐까 싶었다.

여행은 짧았지만 내가 사는 미국과 견주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요즘처럼 도처에서 미국이 비난받는 때도 없어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미국은 세계인이 우러러보는 나라다. 수백, 수천만 이민자에게 새로운 삶을 선사했고 나도 그 혜택을 입어 지금 미국에서 살고 있다. 감사한 일이다. 그 감사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 지구촌 어디에서나 공감될 수 있도록 미국이 '아름다운 나라'라는 이름값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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