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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서 강제 추방된 도산은 가족도 못 보고…

[LA중앙일보] 발행 2018/02/12 미주판 8면 기사입력 2018/02/11 15:08

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도산 공화국(21)

도산공원에 있는 도산 안창호의 동상. 작은 사진은 도산 선생이 구금 당할 당시의 사진.

도산공원에 있는 도산 안창호의 동상. 작은 사진은 도산 선생이 구금 당할 당시의 사진.

사회주의자로 오인 받아 고초 겪기도
도산의 유복자는 아버지 얼굴도 몰라

파차파는 미주에 세워진 첫 코리아타운
농사 불황 탓으로 다뉴바 등으로 떠나

2016년 리버사이드 시의회 조례안 확정
'문화관심지'로 지정해 역사적 의미 부여


◆안창호 생애 마감

도산 안창호는 1932년 가족이 있는 미국을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윤봉길 의사 홍커우 공원 폭탄 투척 거사사건(1932년 4월 29일)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된 후 한국으로 송환되는 소식을 '신한민보'(1932년 6월 30일)는 자세히 전하고 있다. '안도산 선생 조선으로'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기재된 6월 2일 상해 전보에 의하면 도산 안창호 선생은 5월30일에 상해에서 떠나는 안경환으로 조선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다. 동 안경환은 동 4일에 청도를 거쳐서 7일에 인천항에 도착하리라 하였다. 선생의 이 길은 그립고 그립던 고국 강산에 돌아가시지마는 첨사 주사로 결박한 몸으로써 원수의 핍박 학대 아래에서 헤매이는 백의 동포들을 인천항에서 처음 대하실 때 자연 뜻하지 아니한 눈물이 용솟음칠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안창호는 1935년 2월에 가석방되었다. 1937년 6월 28일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1937년 12월 24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경성대학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이듬해 3월10일 사망했다. 결국 도산 안창호는 사회주의자라는 투서에 의해 1926년3월 미국에서 강제 추방되었고 영영 다시는 가족을 보지 못하고 1938년 사망했다. 유복자 막내아들 안필영(랠프)은 아버지 얼굴을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파차파캠프의 의미

이제까지 연재한 글을 통해 리버사이드의 파차파 캠프, 즉 도산 공화국이 도산 안창호의 초기 미주 활동의 중심이었으며, 독립운동의 메카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또한 파차파 캠프는 미 최초, 최대의 한인타운을 형성하고 있었고 미주에서 코리아타운의 효시로 인정받아야 하며, 특히 도산공화국으로 불릴 만큼 자치적으로 운영되어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린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특히 도산 안창호의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에 한인타운 형성이 가능했는데 리버사이드 한인타운은 가족 중심의 커뮤니티를 형성한 특징이 있으며 각종 행사가 열렸고, 일요일에는 예배를 드렸다. 동시에 공립협회와 신민회는 바로 리버사이드의 파차파 캠프에서 창립되었거나 발기되었다.

1905년부터 1913년 12월까지 리버사이드 한인타운은 도산 안창호의 리더십으로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독립운동의 메카 역할을 담당했다. 그곳에는 약 200여 명 이상이 거주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취업을 위해 타지역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고 1913년 한파로 파차파 캠프는 위기를 맞이한다. 즉 1913년 1월 강추위가 리버사이드 지역을 강타하여 오렌지와 과일나무들이 얼어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다. 1911년에 220만 상자를 생산했는데 1913년에는 불과 33만4800상자 밖에 생산하지 못했다.

리버사이드 농장이 대규모 피해를 입었고 많은 노동자들은 직장을 잃게 되면서 한인 노동자들도 리버사이드 지역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13년 한인 공동체의 중심인 도산 안창호가 LA로 이주했음에도 리버사이드 한인타운은 지속되었다. 이러한 정황은 리버사이드 한인 장로 선교회가 1918년까지 파차파 캠프에서 예배를 드린 기록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이후 한인들이 다뉴바, 리들리, 기타 지역으로 지속적으로 이주하면서 자연스럽게 흩어지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파차파 캠프는 1936년 보험 지도에는 멕시칸 거주 지역으로 표기 되어 있다.

이처럼 리버사이드 한인타운 파차파 캠프 또는 도산 공화국은 도산 안창호의 미주 생활과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는 미 최초의 한인타운으로, 도산의 미주 독립운동의 메카로 인정받아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 다행히 리버사이드 문화위원회에서 2016년 6월15일 파차파 캠프를 리버사이드 시 '문화 관심지(City Point of Cultural Interest)'로 지정하는 것을 승인했고 거의 6개월간의 재심사를 거쳐 12월6일 리버사이드 시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원래 리버사이드 시는 '문화 관심지'라는 사적지 조항이 없었다. 파차파 캠프는 남아 있는 건물이나 유물이 없었기 때문에 리버사이드 시는 '문화 관심지'라는 새로운 시조례를 문화위원회에서 통과시킨 후 파차파 캠프는 리버사이드 시 문화 관심지 1호로 지정된 것이다.

리버사이드 시 문화 관심지 지정을 추진하는 과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 이유는 의외의 복병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도산 안창호의 외손자 필립 커디가 리버사이드 시에 파차파 캠프를 시 문화 관심지로 지정하는 것을 절대 반대한다는 의견서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필립 커디는 "샌프란시스코가 최초의 한인타운이다" 또는 "리들리와 다뉴바가 최초의 한인타운이다" 또한 파차파 캠프는 존재하지 않은 "유령타운 (ghost town)"이라고 주장하는 등 진정서 수십 장을 리버사이드 시에 보냈다. 도산 안창호의 업적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알리려는 사업에 정작 도산 안창호의 외손자가 반대한 것이다. 리버사이드 시 관계자들은 일단 시간을 갖고 다시 정리하자는 입장으로 선회하면서 7월 통과시키려던 계획을 수정하여 12월로 연기했다.

필립 커디는 또한 리버사이드 시 관계자들에게 파차파 캠프 사적지 지정을 한인 사회에서 적극 반대하고 있으며 한국 정부의 고위 관리도 반대한다고 사실을 왜곡했다. 그러나 당시 LA총영사인 이기철 총영사는 리버사이드 시에 적극적으로 찬성한다는 서한을 제출했다. 또한 2016년 12월6일 약 70여 명의 한인들이 시의회에 참석했는데 정작 필립 커디는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필자는 새로 발굴한 각종 자료와 사료를 리버사이드 시에 제출했고 6개월간의 외부인 확인 절차를 거친 후 리버사이드 시에서 최종 통과되었다. 아쉽게도 파차파 캠프의 건물이나 유물들이 보존되지 않아서 역사 유적지로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리버사이드 시에서 파차파 캠프를 미주 한인 최초의 한인타운으로 인정하고 그곳을 '문화 관심지(City Point of Cultural Interest)'로 지정하는 시 조례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것은 미주 한인사와 도산 안창호의 독립 운동사를 다시 쓰는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22회로 계속>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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