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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 심한 SF 떠나 리버사이드로 이주

[LA중앙일보] 발행 2018/02/26 미주판 8면 기사입력 2018/02/25 16:58

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도산 공화국(23)

김순학씨의 이민국 서류.

김순학씨의 이민국 서류.

한인 24가구 거주…남자 62명, 여자 39명
타 지역과는 달리 가족 중심 공동체 형성

전낙청의 조카 전경무는 특파원으로 활동
1945년 귀국해 올림픽대책 부위원장 역임


파차파 캠프 한인들

파차파 캠프가 미국 최초 그리고 최대의 한인 타운이었다는 것이 새로운 연구로 밝혀졌다. 특히 파차파 캠프는 타 지역과는 달리 가족 중심의 공동체가 형성됐다는 특징이 있다. 젊은 총각 중심으로 형성된 타지역의 한인사회와는 달리 여성과 아이들이 함께 거주하는 가족 중심의 한인타운이 형성된 것이다.

1910년 미국 인구 조사에 의하면 파차파 캠프에 24가구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중 16세대는 여성과 아이들이 포함된 가족이었고 총각은 단 6가구였다. 부모는 없고 아이들만 타인에 맡긴 1세대도 있다. 총 101명 중 남성은 62명, 여성은 39명이었다.

파차파 캠프는 우연히 생긴 가족 중심의 한인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도 이미 밝혔다. 리버사이드에 거주하던 안창호를 공립협회 회원들이 샌프란시스코로 이주시켜 공립협회 본부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하와이, 중국, 한국에서 본토에 도착하는 한인들이 무사히 정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 샌프란시스코는 반아시안 정서가 최고였던 시기로 아시안 이민자들은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할 수 없었으며 주거지역도 차이나타운에 국한되었다. 따라서 공립협회의 조직적인 도움이 절대 필요했다.

안창호와 공립협회는 새로 이주한 한인들에게 일자리를 구해주었는데 총각들은 새크라멘토, 유타, 몬태나 등으로 이주시켜 일자리를 제공한 반면 특히 건장하고 경험이 많은 한인 노동자들은 리버사이드로 이주시켰다. 농장주들에게 인정을 받아 더 많은 한인들이 리버사이드에 정착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에 옮긴 것이다. 특히 여성들과 아이들이 있는 한인들은 대부분 리버사이드 지역으로 이주시킨 듯하다. 도산 안창호와 공립협회는 리버사이드에 한인 공동체를 건설하여 일종의 베이스 캠프를 마련하고 독립 운동을 전개하려고 했던 것이다.

공립신보와 신한민보에 게재된 각종 기사와 광고를 분석하여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에 거주했던 한인 가족들의 모습과 생활상을 살펴 보기로 한다. 초기에는 안창호의 부인 이혜련의 척숙 (성이 다른 일가 가운데 아저씨뻘 되는 사람)인 김인수와 장남 김용련이 파차파 캠프 한인 공동체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김용련의 딸 바이올렛은 아직도 리버사이드에 거주하고 있다. 김순학과 아들 김태선은 리버사이드에 거주하다가 마차 사고와 암으로 일찍 사망했다.

전낙청과 그의 딸 엘렌, 조카인 전경무와 전경부는 리버사이드 거주하면서 살았던 모습을 글로 남겼다. 따라서 전낙청의 글과 엘렌 전, 전경무의 글들을 통해 당시의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차정석은 초기부터 리버사이드 공립협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파차파 캠프 형성에 큰 기여를 했다. 차정석과 부인 차정성은 슬하에 자녀가 없었지만 교회와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백신구와 손광도 부부는 7남3녀의 자식이 있었는데 장녀인 백광선은 자서전 '조용한 방랑'을 남겼는데 파차파 캠프에서의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박충섭과 박영섭 형제 가족도 파차파 캠프의 주요 구성원인데 여동생 박애주는 구정섭과 결혼하여 리버사이드에서 함께 살았다. 후반기에는 리운경과 그의 모친이 파차파 캠프 명맥을 이어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

전경무 가족

전경무는 전낙청의 형 전낙준의 아들이다. 하와이에 거주하던 전경무와 전경부 형제는 공부를 더하기 위해 리버사이드에 살고 있던 전낙청의 집에서 살면서 학교를 다녔다. 1913년 전경무가 중학교 1년급, 전경유가 소학교 2년급이었다. 전경유는 전경부를 잘못 표기 한 듯하다.

'신한민보' 1913년 10월 31일 "리버사이드 학생. 리버사이드에서 공부하는 우리 동포 학생은 여좌. 전경무 중학교 1년급, 전경유 소학교 2년급, 김달리 동녀학생 1년급"

전낙준과 전경무 가족은 글 쓰는 재주가 많은 듯하다. 전낙준의 아들 전경무는 출판되지 않은 자서전을 남겼는데 그것을 읽고 사촌인 엘렌 전이 개인 메모, 즉 '퍼스널 노트(Personal Note)'를 쓰기도 했다. 거기에서 리버사이드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판잣집의 마루는 여기저기 균열이 있었고 쪼개진 곳도 있었는데 돈이 없어 고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머니는 돗자리라도 짜서 마루에 덮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시간이 없어 방치해야 했다. 이럴 때 경부와 경무의 어머니가 함께 있다면 돗자리를 함께 짤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곧 잊어버렸다."

이선주도 전경무의 기록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한인 커뮤니티는 두 줄의 철로 부근에 있었다. 그곳은 모두 스무 채 가량의 빨간 주택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최근에 도착한 약 200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가정을 이룬 10가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경부와 경무의 아버지 전낙준과 어머니는 하와이에 거주하고 있었다.

"집이 좁은 데다가 침대도 모자라서 한방에서 네 명이 마루바닥에서 자야 했다."

전낙청은 '홍경래전'과 '부도'라는 소설을 남겼다. 또한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동아시아 도서관(East Asian Library)에서 소장하고 있는 또 다른 전낙청의 글, '구제적 강도'라는 제목의 글이 있는데 '잭 전'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잭 전'이 리버사이드에 있는 미시즈 윌킨스를 만났고 '잭 전'은 '에바 헤스팅'과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미시즈 윌킨스'는 아래를 참고하면 '잭 전'을 돌보아 주던 주인집 아주머니이다. 아래의 '전 엘리자벳, 전 엘렌, 전 잭, 전 애모스, 전 에서'는 모두 전낙청의 자녀들이다.

전경무는 리버사이드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미시간 대학에 진학하여 학창시절에 미식축구 선수 및 웅변부장으로 활동했다. 1923년 제1회 대한인유학생 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전경무는 유창한 영어로 사회를 보았다. 이때 서재필이 정계의 유학생의 선진이요, 원로로서 연설하였다.

1924년에는 미국 본토 미시간 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고 하와이에 있는 부모님에게 근친을 갔는데 하와이 사회에서 큰 환영을 해주었다. 전경무는 영어 웅변가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졸업 후 워싱턴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전경무는 1925년 9월12일에 서매리아와 결혼했다. 1928년 부부는 함께 풀러턴을 방문하여 동포들의 사택에서 만찬을 즐겼다.

'신한민보' 1932년 8월 25일 "올림픽 대회의 성황, 인종 관념 없는 스포츠"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는데 이 기사를 취재한 사람이 신한민보사 특파원 전경무이다. 전경무는 대한인국민회 외교원으로서 시카고로 가서 중일 관계, 만주 문제, 조선 문제 등에 대해 강연하기도 했다. 1945년 전경무가 중국 공산당 신문의 통신원이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것은 거짓이라고 신한민보에서 변호해 주었다.

신한민보는 전경무는 중국 헌정당의 기관지 '신중국보'의 영문란 기자가 되었으나 헌정당과 그 기관지는 공산당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1945년 11월 한국으로 귀국하여 올림픽 대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활동하였는데 1947년 6월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개최되는 제 40차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5월 29일 미군 전용기편으로 출발하였다가 일본 동경 비행장 근처에 있는 산정에서 탑승 비행기가 충돌하여 동승자 40명과 함께 참사했다.

<24회로 계속>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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