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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셔 플레이스] 동맹과 전범이 헷갈리는 세상

금싸라기 땅에 거대한 흉물이,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둘씩이나. 그렇다고 철거도 안 된다. LA에서 남쪽으로 약 40마일 떨어진 '터스틴 레거시(옛 해병대 항공기지)'에 실재한다. 높이가 17층 빌딩과 맞먹어 멀리서 봐도 한눈에 들어온다.

한인 밀집 거주지역이기도 해서 대체 저게 뭔가 궁금해하는 분들도 적지 않다. '흉물'은 격납고. 1940년대 초, 제2차 세계대전 때 비행정을 보관했던 곳이다. 일본군의 잠수함 공격을 탐지하기 위해 여기서 비행정을 띄웠다.

연방정부 '모뉴먼트'로 지정돼 있어 허물기는커녕 옮길 수도 없다. 확 밀어버리면 경제적 효과가 수십억 달러는 족히 될 텐데. 요즘 이 단지에 새로 짓는 하우스는 아무리 작아도 밀리언 달러가 넘는다. 개발에 걸림돌이어서 '애물단지' 취급을 받을 수밖에.

볼품없는 이 건물이 어떻게 국가의 기념물이 됐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무로 지어서다. 격납고를 만드는 데 쓰인 목재는 오리건이 원산지인 미송(더글러스 퍼). 무려 270만 개나 되는 송판을 엮어 격납고 한 채를 지었다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겠다.



철근 콘크리트로 짓지 왜 나무로? 전쟁 중이어서 쇠란 쇠는 몽땅 '민주주의 병기창(Arsenal of Democracy)'이란 데로 보내졌다.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그렇게 이름을 지어 유명해진 곳이다. 결국 엔지니어들이 머리를 맞대 내놓은 결과물이 바로 목재 격납고. 유례가 없을뿐더러 당시 미국 첨단공학기술의 상징이기도 해 자부심이 대단했을 것 같다.

그런데 '아스널' 곧 '병기창'은 어디를 말하는 걸까. 디트로이트를 비롯해 피츠버그, 펜실베이니아 등 한때 세계 제조업의 메카로 불렸던 곳이다. 자동차 조립라인에선 탱크와 비행기가 쏟아져 나오고, 조선소에선 각종 전함과 항공모함이 줄을 잇고. 미국이 이처럼 단기간에 전쟁물자를 대량생산해 낼 수 있었던 건 US스틸 공이 컸다. 쇠붙이는 모두 이 제철소의 용광로에서 강철이 돼 나왔기 때문일 터.

'병기창' 덕분에 독일과 일본의 야욕을 꺾어놨으니. 일찍이 '철은 자유의 수호자'란 명언을 남긴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예언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90년대 이후 '아스널'은 쇠퇴의 길을 걷는다. 제조업이 무너지는 바람에 공장은 문을 닫아 기계는 녹이 슬고. 이른바 '러스트 벨트'가 된 것. 산업의 기반인 철강도 경쟁력을 잃어 그 많던 일자리가 대부분 없어졌다.

트럼프가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수입산 강철에 관세 폭탄을 예고, 파장이 커지고 있다. '러스트 벨트'를 '병기창'으로 만들어 옛 영광을 되찾아주겠다는 거나 다름없어 이 지역 노동자, 특히 백인들이 열광하는 분위기다.

한국이 자칫 직격탄을 맞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태양광 패널과 세탁기에 세이프가드(긴급수입 제한조치)를 발동한 데 이어 이젠 철강까지. 가상 적국인 중국은 그렇다 치자. 하필이면 왜 동맹을 콕 찍어 손을 보겠다는 건지. '전범국' 일본은 명단에서 쏙 뺀 채.

터스틴 해병대 기지는 세계대전이 끝난 뒤 폐쇄됐으나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자 다시 오픈하는 등 곡절을 겪었다. 격납고엔 비행정 대신 헬리콥터가 들어서고. 그래서인지 기지 인근엔 '인천 웨이'를 비롯해 한국과 관련된 거리 이름이 적지 않았다. 이젠 개발 열기에 함몰돼 거의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남은 길은 '빅토리 로드' 뿐이다.

요즘 한미관계가 예전만 못한 것 같아 좀 찜찜하다. 동맹을 넘어 한때는 혈맹이라고까지 불렀지 않은가. 함께 '빅토리' 곧 승리하는 길이 분명 있을 텐데. 운전 중 격납고를 바라볼 때마다 느끼는 소회다.


박용필 /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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