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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민보 논설 통해 대한독립의 중요성 강조

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도산 공화국(27)
일본의 압제 고발하고 한미동포간 협력 호소
LA서 채소 상점 열고 광복군 후원금 등 지원

차정석과 지방회

차정석의 남자 형제는 차원석 차광석 차리석이 있다. 이들은 친형제이거나 같은 항렬의 사촌 형제다. 차원석은 한국에 있었고 차광석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신학 공부를 위해 왔다. 차리석은 중국에서 활동했다. 여자 형제는 차락희 차보석이 있다. 한편 차정석과 차의석은 같은 항렬의 사촌 관계다.

차정석의 활동

차정석은 리버사이드에서 1907년에서 19013년까지 활동했다. 가장 초기의 기록은 1907년 5월 '공립신보'다.



'공립신보' 1907년 5월 10일 '하변회보고'에서 총회를 위한 의연금 1원을 냈다. 차정석은 1907년에 리버사이드 지방회 회장이었다. 차정석은 1908년에도 리버사이드 지방회 회장으로 활동한다. 같은 시기에 차정석은 리버사이드 근처에 있는 레드랜즈 지방회의 회장으로도 나타난다.

차정석은 신한민보를 위해 10원을 연조하였다고 '공립신보' 1908년 8월 5일자는 보도했다. 차정석은 1909년 리버사이드 지방회 회장이었다. 1909년 5월 리버사이드에서는 한국 함경남도 문천군 기근에 연조하였다. 차정석은 이응호와 더불어 수전위원으로서 34원 50전의 의연금을 수합하기도 했다고 '신한민보' 1909년 5월 19일자는 보도하고 있다.

1909년 리버사이드 지방 회원들이 지식을 교환하기 위해 토론회를 조직하였는데 차정석은 서기로 선정됐다. 차정석은 1910년 자동차에 목을 부딪치는 큰 사고를 당했다. '신한민보' 1910년 10월 26일 "차정석 씨 낙상. 리버사이드 차정석 씨는 일전에 길로 지나다가 우연히 자동차에 부딪혀 목을 다친 고로 즉시 병원에로 가서 치료하는 중인데 처음에는 목이 부어 언어를 통하지 못하더니 지금에는 적이 차효가 있어 간신히 어음을 발한다더라."

1911년에 리버사이드에서 있었던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 준비를 위해 차정석은 간사 위원으로 역할을 담당했다. '신한민보' 1911년 11월 20일에는 "하변 지방에 대의회 준비. 국민회 하변동 지방회는 금년도 대의회가 해지방에서 소집이 되는 고로 특별히 주인되는 예수를 다할 뿐 아니라 각처 대의원에게 간친한 성의를 표하기 위하여 응접위원은 김인수 씨 간사위원은 차정석 씨로 택정하여 일반 대의원을 편리토록 응접 주선할 터이라더라"고 보도했다.

차정석은 또한 리버사이드 대의원의 자격으로 대의회에 참석했다.'신한민보' 1912년 3월 18일 '하변지방회'보에 차정석은 자치위원과 의무금 수봉위원으로 활동했고 1913년에는 리버사이드 지방회 회장이었다.

차정석은 1917년에는 패서디나로 이주했는데 신한민보사 가옥을 유지하기 위해 모금 운동을 전개하는 논설을 썼다. 신한민보사 가옥이 동포들을 지켜주는 의지처라는 것을 강조했다. 1919년 한국에서 독립 운동이 일어난 이후 차정석은 신한민보에 논설을 게재했는데 한국 동포와 해외 동포의 긴밀한 협력과 단합을 주장하고 있다.

'신한민보' 1919년 3월 25일에 게재된 논설이다. "바다 밖에 나온 동포에게 경고. 우리 민족이 나라의 주권과 민족의 행복을 저 원수에게 빼앗긴 이후 저 원수의 한량할 수 없는 압제와 학대를 당하는 중에 그 중 더욱이 우리의 경애하는 지사를 포박하여 악형을 그 몸에 심히 하여 살해하였으며 점점 우심하며 우리 전체 민족을 잔멸코저하는 악독한 정책을 쓰니 우리 해외에 재류하는 동포는 이를 살펴 맹성할지어다. 지난 10년 동안에 이 압제와 학대를 받은 자 그 누구며 악형과 학살을 당한 자 그 누구요. 해외에 있는 우리들의 부형이오 자질이며 친척이오 친구며 아울러 또한 우리의 혈족이니 참으로 볼진대 저 원수는 우리 각 개인의 원수요 온통 민족의 공통한 원수올시다. 그러나 외양에 재류하는 우리 동포 중에 아직도 원수를 원수로 알지 못하며 동족을 동족으로 깨닫지 못하는 자 있으니 가통할 일이올시다. 지나간 일은 다 말씀 않으려니와 오늘날 당한 피치 못할 담책이 온통 민족에게 이르렀으니 이는 곧 본원 2일에 내지 동포들이 원수의 강제 밑에서 협심 단결하고 일시에 각처에서 일어나 대한 독립을 선언함이라. 장쾌하도다. 내지 동포의 애국성이여. 담대하고 용맹하도다 내지 청년의 모험적 대활동이여! 과연 훼와에 있는 자로 하여금 잠을 깨게 하며 기뻐 미칠 듯 뛰놀게 하였도다. 그러나 독립을 선언하였다고 기뻐만 함은 아닐지니 반드시 우리가 독립을 회복하기까지 온통 민족이 굳게 단합하여 전심 성력으로 재주와 재정을 아끼지 말고 중로에 끊침없이 진력하여야 될 바니 우리 일반 동포는 단합하여 인도자의 지휘 아래 의무를 사양치 말고 백절불굴하는 성의로 싸워 나아가다가 독립을 회복하옵시다. 또는 내지 동포의 오늘 당하는 참상을 살피는바 비극 참극이 형언할 수 없겠으리니 첫째로 내지 동포의 생명을 하루 바삐 구원하여야 될지라. 이 구원은 외양에 있는 우리의 원조와 운동이 아니면 할 길이 없으니 한량할 수 없는 참혹한 살육 속에 있는 우리 동족을 빨리 구원하는 일에 혈성을 다하여 진력하시기를 절원하옵고 감히 두어 말로 해외에 계신 모든 동포 앞에 경고를 올리나이다."

차정석 가족

차정석은 1923년에 LA에 새로 채소 상점을 열기로 계획했고 이주 후 1923년에 차정석은 LA지방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신한민보 기자는 차정석의 집에서 점심을 먹고 함께 지방 회관으로 갔는데 그곳에는 지방 회원 남녀 30여 인이 모여 있었다고 '신한민보' 1923년 9월 27일자로 보도했다. 차정석은 신한민보가 사라지는 1945년 12월까지도 신한민보에 이름이 나타난다. 계속 의무금을 납부했고 어려움에 처한 동포에게 연조하거나 본국 동포에게 연조하거나 광복군후원금 총회의 활동에 참여하고 지원했다.

차정석 부인 차정성

차정석은 부인 차정성과의 슬하에 자녀를 보지 못했다. 대신 차정성은 시누이 동생들이 있는 샌프란시스코를 빈번하게 내왕했다. 시누이 동생 부부들은 미주 한인 사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인물들이다. 이 여성들과 교류하면서 길러주고 돌봐주는 어머니 역할을 했다. 차정성은 1924년 패서디나에 살았는데 동생을 만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다. 차정성은 1925년에도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는데 시누이 동생 백락희(차락희) 집에서 유숙하였다. 그리고 조카 메리를 데리고 LA에 돌아왔다. 1927년 차정성은 다시 패서디나로 이주했는데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친족을 방문했다.

차정성은 1928년 7월 LA주일 학교 대회를 구경 온 시누이 황보석(차보석)과 함께 주일 학교 대회를 구경갔다가 18일 함께 돌아오기도 했다. 이처럼 차정성은 친족들을 방문하는 일이 매우 잦았고 특히 여자 형제들과 매우 친밀하게 지냈고 조카들과도 각별한 사이었다. 1930년에 차정성은 패서디나에 살았는데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동생들을 방문하였다. '신한민보' 1930년 7월 10일 "차부인 상항 심방. 패사데나에 다년 거류하는 차정석 씨의 부인 정성 씨는 상항에 있는 동생들을 심방차로 지난 토요일 저녁에 안착하였더라."

차정성은 1919년 3월 27일자'신한민보'에 "부인 독립 의연금 10원을 의연했다"고 이름이 나타난다. 차정성은 이후에도 부인 단체에 매번 의연하였고 기근 구제 학생 원조 등을 하면서 조국의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8회로 계속>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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