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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1918년부터 여성 입회 가능

[LA중앙일보] 발행 2018/04/02 미주판 8면 기사입력 2018/04/01 11:16

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도산 공화국(28)

차정석·정성 부부 슬하 자녀 없어
차정성은 교회와 사회 위해 분투

1944년 59세로 샌프란에서 별세
사촌 차의석 자서전 '금산' 남겨

1913년 도산선생(오른쪽 두번째)이 리버사이드 한인들과 함께 한 모습. 정장을 한 채 장총과 권총을 들고 있는 한인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1913년 도산선생(오른쪽 두번째)이 리버사이드 한인들과 함께 한 모습. 정장을 한 채 장총과 권총을 들고 있는 한인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차정성의 국민회 활동


1918년부터 여성의 대한인 국민회 입회가 허락되었는데, 차정성은 대한인 국민회원으로서 지속적으로 모금 운동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신한민보' 1931년 2월 5일 "국민회 제22회 창립기념일에 대성황" 이라는 보도에서 1931년 2월1일에 부인들이 국민회에 입회하였다고 보도했다.

이 날은 제22회 국민회 창립 기념일이었는데, LA에서는 80명이 참석했고 차정성의 시누이 동생들인 황보석(차보석), 백락희(차락희)가 입회했고 차정성은 남편 차정석과 함께 각각 1원씩 연조하였다. 황보석(차보석)의 남편 황사선이 이 행사에서 기도하였고, 백락희(차락희)의 남편 백일규는 연설하였다.

차정성은 1944년에 사망하였다. 신한민보 1944년 3월 30일 보도. "사망. 상항 차부인 정성 씨 3월 26일 별세" 했다고 다음과 같이 자세히 보도했다. "차정성은 향년 59세로, 평양 동촌 출신이다. 1902년에 차정석과 결혼하였고 남편이 1904년에 하와이로 떠나자 1905년에 따라왔다. 이후 1906년에 남편과 같이 미국 본토에 들어와서 5년간 리버사이드에 있었다. 차정성은 차정석과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그녀는 또한 교회와 사회를 위하여 일했고 화평한 성품으로 이웃의 존경을 받았다고 평가받았다."

신한민보 1944년 4월 6일 보도. "지방 소식. 차부인 정성 씨의 장의 후문, 상항에 재류하는 차정석 씨의 부인 정성 씨의 별세는 일찍이 본보에 보도한바 장의 거행에 관한 상항 통신이 아래와 같다. 부인은 반생을 미국에 있는 동안 그 남편과 분투 생활을 같이 하는 동시 교회와 사회를 위하여 노력을 더하였고, 아울러 처세가 평화로워 린리의 경의를 받고 있다가 이제 세상을 떠나매 친척 친우가 다 같이 애도하고 남편 차정석 씨는 부인과 청년에 결혼하여 멀리 바다를 건너 와서 같이 늙는 가운데 다만 한 가지 유감 되는 것은 자녀가 없어 슬하가 비인 것이오, 이로 말미암아 쓸쓸한 백발이 서로 의지하고 있다가 외로운 남편을 두고 먼저 가매 내조를 잃어버린 차정석 씨는 다시 마음을 둘 곳이 없고 그 경상을 보는 친척 친우는 씨를 위하여 더욱 부인의 서세를 슬퍼한다더라. 상항 통신."

차정석의 사촌 형제, 차의석

차의석은 겨울 오렌지 농장 시즌인 크리스마스 직전부터 봄까지 10주 정도 리버사이드로 와서 농장 일을 했다고 자신의 자서전 '금산'에서 밝히고 있다.

또한 자신의 사촌인 차정석과 그의 부인도 하와이에서 리버사이드로 이주했는데 공교롭게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직후 1906년 대지진이 발생하여 걱정을 많이 했다. 다행히 드류 박사의 도움을 얻어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한 후 리버사이드로 무사히 이주했다고 했다.

"사촌과 부인은 다행히 리버사이드에서의 생활에 만족했는데 특히 기후, 일, 그리고 생활 환경 등이 좋았다. 리버사이드가 미국에서 가장 큰 최초의 한인타운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듯하다."

차의석은 미 육군에 자원 입대했다가 제대했다고 '신한민보'(1919년 3월 13일)는 보도했다. 차의석보다는 차정석이 리버사이드에서 활동을 많이 했다. 차정석이 리버사이드 지방회에서 임원으로 활동했을 때 차의석은 리버사이드에서 공부를 했다. 차의석은 나이가 차정석보다는 어리다. 차정석 가족은 모두 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차의석은 1906년 10월 리버사이드에서 소학교 4반에 입학하였다. 1907년 2월에 리버사이드에서 소학교 5반이었다. 정등렵, 김영일, 김창률 등도 같은 시기에 리버사이드에서 소학교를 다녔다. 1907년 6월에 리버사이드 지방회 통신원으로 임명되었다고 '공립신보' 1906년 11월 8일 '학무보고'에서 밝히고 있다.

1907년 11월에는 솔트레이크 지방회 서기로 나타난다. 차의석은 솔트레이크로 이주한 후 공부를 하면서 독립운동에 전념한듯 하다. 많은 사람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는데 솔트레이크에서 방건초에게 매달 3원씩을 보조받았고, 안리용과 윤진오에게 각각 매달 2원씩 보조받았다고 '공립신보' 1907년 11월 15일자가 보도했다.

1910년에는 다시 리버사이드로 돌아와서 공부했다. 소학생 명단에 차의석의 이름이 보이는데, 백신구의 자녀들인 백명선, 백광선도 나타난다. 이때 차정석은 리버사이드 지방회 회장이었다. 1911년 차의석은 신한민보사에서 활자 조판일을 하였다. 그리고 차의석은 1913년 미주리에 있는 팍칼리지 중학교에서 공부하면서도 조국의 독립을 학생들에게 적극 알리는데 앞장섰다.

그는 학생회에 입회하여 우리나라 정형을 연설하였다고 '신한민보' 1913년 9월 19일자에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신한민보' 1914년 5월 21일 보도. "차씨 서인 교섭. 칼니포니아에서 여러 해 류하던 차의석 씨는 지금 미쥬리 팍볕 땅에 있는 파악칼네지에서 공부하는데 본래 명민하고 재지 있음으로 서양 학생들과 교섭이 빈번하고 교정이 친절하므로 특별히 사랑을 많이 받는 중에 그 학교에 있는 각국인 학생회 '코스모풀니단 클럽'에 입회하여 때때로 본국 정형을 통지하는 중에 금월 5일 특별 대회석에서 본국 정형으로 강개 격절한 연설을 하매, 회중이 박수갈채하기를 오래하였으며 또한 하기 방학 전에 다시 그와 같은 대회를 모일 기회가 있는 고로 차씨는 다시 그 기회를 타서 본국 형편을 말하고자 하는 중이라더라."

차의석 부인 차영선(김영선)

1928년 차의석은 시카고에 재류하는 당시 김영선(차영선)과 결혼하였다. 차영선(김영선)은 의주에 원적을 두었고 이화학교 출신이었다. 간호부를 졸업하고 유학을 위해 1926년 6월에 미국으로 건너왔다. 듀북 대학 입학 예정이었다.

'신한민보' 1926년 7월 1일 보도. "김영선 여사 유학차 도미. 본국 의주에 원적을 둔 김영선 여사는 이화학교 출신으로 통천 능암포에 있는 병원에서 간호부 졸업을 한 후 미주 유학을 목적하고 지난 28일에 입항한 천요마루 선편에 도미하여 이민국에서 하룻밤을 지나고 재작일에 상륙하였는데, 김여사는 장차 뜌북 대학에 입학할 예정이라더라."

'신한민보' 1928년 6월 14일자는 "차.김 량씨의 백년가약. 6월 10일 쉬카고에서 거행. 쉬카고에 다년 거류하는 차의석 씨와 김영선 양은 6월 10일 하오 1시에 혼인 예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는데 그 혼례식은 파울구드 교수가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차의석은 랜드맥랠니라는 미국 회사에 근무하였고, 차영선(김영선)은 뜌북 대학에서 공부했다.

차영석 부인 차영선(김영선)은 결혼 이후에도 킨우드로링 여자 학교에서 공부를 했는데 성적이 매우 우수하였다. 교감인 머리필드 여사가 학비를 면제해 주었다고 '신한민보' 1929년 10월 17일자는 "가정 생활하는 여학생들의 소식"으로 보도했다.

<29회로 계속>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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