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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가주로 이주해 500에이커 벼농사 성공

[LA중앙일보] 발행 2018/04/09 미주판 8면 기사입력 2018/04/08 15:57

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도산 공화국(29)

백신구 가족 사진. 일부 훼손돼 오른쪽 자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백신구 가족 사진. 일부 훼손돼 오른쪽 자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농원의 부족한 일손 메꾸려 필리핀 노동자 고용
한인들 벼농사 경험 많아 대규모 농장주 배출

파차파 거주할 때 신한민보 사옥 건립에 거액 기부
클레몬트 학생연구소 건축위원으로 왕성한 활동

백신구 가족 (1)


백신구는 1906년 하와이에서 리버사이드로 이주했고 1909년 4월에 리버사이드 지방회 신입 회원으로 가입하면서 초기 파차파 캠프에서 활동했다.

'신한민보'에서는 백신구가 대한인국민회 리버사이드 지방회 부회장 및 서기로 임명됐다고 보도했다. 또한 백신구는 리버사이드에서 1909년 조직된 '토론회'의 학무로도 활동했다. 백신구는 리버사이드에 정착하자마자 리버사이드 지방회의 핵심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1909년 5월 12일자 '신한민보'에는 백신구 명의로 다음과 같이 "사람을 찾는 광고"가 실렸다.

"본 지방회에서 여러분에게 긴요하고 절박한 통신이 있사오니 그 머물러 사는 곳을 아시는 동포는 밑에 기록한 번지대로 시급히 소식을 전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사람들의 거주지를 아는 분들은 1532 파차파 애비뉴 주소로 알려 달라는 광고이다.

40명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는데 '회원 찾는 광고'라는 점에 비추어 이들 40명의 회원들이 현재 어디서 거주하면서 일하고 있는지를 찾는 광고인 듯하다.

당시 리버사이드에 거주하면서 계절노동자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한인 노동자들은 타지역으로 잠시 이주했다가 다시 리버사이드에 오는 경우가 많았다. 명단에 있는 사람들은 리버사이드 지방회원으로 등록되어 있으나 거주지를 옮긴 사람들의 명단인 것으로 보인다. 이 명단에는 여성들 이름도 보인다.

'신한민보'에 1910년 1월 12일부터 1910년 3월 9일까지 7차례 반복 게재되었던 "창건 보관 가옥 취지서. 분발하라 애국 남자, 찬성하오 동지 제군" 기사가 있다. 이 기사는 신한민보사 가옥 창건을 위한 동맹원 모집과 기금 모금을 위한 글이다. 가장 하단에 리버사이드 대표원으로 차정석, 백신구, 이석원이 있다. 백신구는 신한민보사 가옥 창건을 위한 기금 30원을 냈다.

'신한민보' 1910년 7월 27일 보도 "백신구 씨의 성심. 리버사이드에 있던 백신구 씨는 현금 클래몬트에 이주하였는데, 수다 권솔의 생활이 곤란하고 사채가 불소함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빚을 얻어 신문사 가옥 고본금 30원을 판출하였으니, 과연 지극한 성심이더라."

백신구와 가족들은 1910년 근처의 클레어몬트 지역으로 이주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백신구는 클레몬트 학생양성소 건축 위원으로 모금 활동을 펼쳤다. 또한 백신구는 클레몬트 지방회 회장으로 역임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북가주에서 쌀농사

그후 백신구와 가족은 북가주로 이주한 후 쌀농사에 성공했다. 백신구는 백미 대왕으로 알려진 김종림과 함께 쌀농사에서 성공을 한 것이다.

'신한민보' 1916년 8월 3일자는 "한인 벼농사의 큰 경영. 2085에이커. 가주 한인 농작계에 가장 범위가 크고 또 유망한 경영은 근년 이래 벼농사를 첫째로 치는 것이라. 이 벼농사의 세력을 잡은 김종림 씨는 작년에 큰 이익을 얻었으므로 금년에 와서는 그 계획을 일층 더 확장하며 기타의 뗄라맨, 윌로쓰 각 농원들도 또한 큰 자본을 던져 에이커 수량을 늘림으로 양 처 경영이 2085에이커에 달하였더라. 이제 각 농원 토지의 에이커 수량을 나누어 보건대 왼쪽과 같으니, 뗄라밴(김종림 1030에이커, 박영순 240에이커, 이진섭 150에이커, 황명선 80에이커, 임지성 80에이커, 백신구 75에이커). 윌로우쓰(맹정희 250에이커, 신광희 100에이커, 김두호 80에이커)"라고 보도하고 있다.

1차 세계 대전으로 쌀 값이 폭등하여 쌀 재배 한인 농장주들이 큰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백신구를 비롯한 한인이 벼농사에 성공한 큰 이유는 한인들이 벼농사 경험이 많았기 때문이다. 북가주의 백인들이 한인을 데려다가 감농을 시킬 정도로 한인은 벼농사에 일가견이 있었다.

1918년 가을에 벼농사도 크게 성공하였다. 김종림이 1800에이커, 백신구는 500에이커를 농사지었고 빠인드라는 기계로 벼 베기를 시작했다.

한편, 비가 온 후 기계를 쓸 수 없게 되자, 벼농사에 능한 한인을 일꾼으로 쓰려는 백인이 많아서 노동의 호황이었고 한인의 농원에서는 어쩔 수 없이 필리핀인을 노동자로 쓰는 일도 있었다고 보도했다.

'신한민보' 1918년 10월 10일자는 "북가주 깊은 가을, 동포 벼 농장은 일시 수확을 착수, 수확미 21만 뿌술을 예상. 공정 가격으로 쳐도 통계가 90만 7천여 원이로다"라는 제목으로 긴 기사를 보도했다.

'신한민보' 1918년 11월 7일자는 "벼농사 수확이 거의 끝남 … 백신구 씨의 농사도 풍작. 지방 소식을 의지하건대 동포 벼농사의 수확은 한동안 날기지가 좋았음으로 아무 장애 없이 거의 다 거두어 들였고, 일시 실망에 있던 백신구 씨의 벼농사도 천기의 좋은 혜택을 입어 의외의 풍작을 얻었다더라"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30회로 계속>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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