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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창] 우리는 이민자다

[LA중앙일보] 발행 2018/04/13 미주판 22면 기사입력 2018/04/12 18:37

#. 성경 창세기 등장 인물 중에 아브라함이 이민자였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롭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새로운 땅으로 이민 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 이야기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어도 이민자로 살아가는 미주 한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새로운 땅에 터를 잡은 후 우물부터 파거나 구입했던 아브라함 일가의 정착 방식은 미국 땅에서 한인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 한인들의 생업 터전이자 장차 후손들을 위해 씨를 뿌려야 할 곳이 더 이상 한국이 아니라 이곳 미국이라는 자각과도 직결되어 있다.

그렇지만 대개의 이민 1세들은 여전히 미국보다는 한국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의 정치 사회에 대해서는 시시콜콜한 것까지 꿰고 있으면서 미국과 관련된 것들은 지나칠 정도로 무관심한 태도가 그런 것이다. 물론 낯선 언어, 이질적인 문화 속에서 익숙한 것에 대한 선호가 오히려 더 강하게 발현된 탓도 있겠다. 그렇지만 자식들에겐 미국 주류 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기대하면서 스스로는 그렇게 무심하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부모 세대의 이런 사고방식 탓인지는 몰라도 1.5세 2세들 대부분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유창하게 영어를 말하고 미국 친구를 사귀면서 스스로 미국인이라 생각하다가도 외모와 사고방식, 문화 등의 차이로 결국은 자신이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존재론적 딜레마에 힘들어하는 것이다.

#. 19세기 서구 문화의 충격 앞에 한·중·일 동양 3국의 지식인들이 느꼈던 당혹감도 이와 비슷했다. 몰려오는 서양 문물에 대한 대응 방식과 폭은 나라마다 크게 달랐고 그에 따라 각국의 운명도 갈렸다. 그렇지만 선진 기술 문명과 문물을 받아들이긴 하되 민족 고유의 정체성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똑같았다. 이를 중국에선 중체서용(中體西用)이라 했고 일본에선 화혼양재(和魂洋才)라 불렀다. 조선에서는 동도서기(東道西器)라 했다.

안타깝게도 조선의 동도서기 운동은 시작도 늦었고 중국이나 일본의 그것만큼 널리 확산되지도 못했다. 게다가 전통적 지배질서와 사회체제를 그대로 두면서 부국강병을 모색하려 했다는 점에서 보수적 개량주의라는 한계까지 있었다.

당시엔 바른 것(성리학)을 지키고 사악한 것(서양과 일본의 개화 문명)은 배척해야 한다는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이 대세였다. 성리학적 세계관만 최고인 줄 알았던 대다수 지배층과 백성들에게 서양 문물은 무조건 '나쁘고 악한'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선 동도서기론 같은 비교적 온건한 주장조차도 설 자리가 없었다. 조선이 근대화의 때를 놓치고 국운 회복의 기회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정체성이란 뿌리에 대한 자각이고 지금 처한 상황에서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뿌리만 쳐다보고 있어서는 튼실한 열매는커녕 싹도 틔우지 못할 수가 있다. 아브라함이 더 이상 떠나온 땅에 연연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 역시 아무리 한국이 편하고 좋아도 언제까지 한국 이야기에만 온 신경을 모아서는 안 되는 이유다.

무조건 한국을 멀리하자는 게 아니다. 이제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 따라, 이념에 따라 우리끼리 나뉘고 반목하는 일은 그만 좀 하자는 것이다. 이미 이민자라는 한 배를 탄 이상 우리만의 항로를 찾고 우리만의 과제 해결에 에너지를 모으기에도 시간이 한참 모자라기 때문이다.

이럴 때 동도서기 같은 옛 선조들의 중심잡기 노력은 지금 한인 이민자들에겐 좋은 방향등이 될 수 있겠다. 그런 맥락에서 비슷한 조어법(造語法)의 '한근미실(韓根美實)'같은 사자성어라도 한 번 곱씹어 보면 어떨까 싶다. 물론 뜻은 '뿌리는 한국에, 그 열매는 미국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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