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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벚꽃처럼 살다 간 사람들

팡 팡 팡, 팝콘 터지는 소리. 극장표를 쥐고 남자 친구랑 영화를 보러 갈 때마다 들었다.

콘이 유리상자 속에서 뻥튀기로 변신하고 고소한 냄새로 매번 설레게 했다. 그 소리를 듣고 그 냄새를 맡아 본지 한참이다. 벚꽃은 팝콘처럼 터지듯 핀다. 올해도 그랬다.

하지만 나는 그 나무 그늘 아래로 스미는 봄 햇살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그 흰 터널을 걸어보지도 못했다.

벚꽃이 한창일 때가 바로 아버지의 기일과 겹쳤기 때문이다. 아버지 산소에 가는 길에 흩날리는 하얀 벚꽃 이파리를 차창 너머로 보는 정도다.



이제 그분을 하늘나라로 보내드리기 충분한 세월인데 여전히 벚꽃 구경이며 팝콘을 들고 객석을 잡는 일이 어색하다.

아버지 산소와 가까운 용인시의 '가실벚꽃길'을 지도에 표시해두고 벼르다 못 갔다. 단지 그 부근 조광조의 묘역과 신도비가 있는 응봉산 자락에 다녀온 정도다. 주변의 벚꽃은 지난번 비로 이미 져버렸다. 430여 년간을 꼿꼿이 버텨온 신도비의 글씨와 문양들이 돌이끼에 얼룩져 보였다. 좀 더 일찍 왔으면 진동하는 벚꽃 향기 속에 있었을 건데.

조광조는 시대를 너무 앞서간 인물이다. 이른 봄 벚꽃처럼 화려하게 피었다가 스러진 비운의 선비다. 그는 연산군 때 문란해진 질서를 바로잡으라는 중종의 어명에 따라 수많은 이상주의적 개혁을 하지만 훈구대신들의 역공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바로 기묘사화다. 불과 서른일곱의 나이였다. 율곡 이이조차 "오직 애석한 것은 조광조의 출세가 너무 일러서…국맥(國脈)이 끊어지게 되었다"고 한탄했다.

조광조는 스스로 꽃이 되었다. 그는 전남 화순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사약을 받았다. 아무도 두려워 그의 시신을 거두지 않았다. 오직 친구 양팽손이 남몰래 그의 시신을 염습해 깊은 골짜기에 묻어두었다가 이듬해 봄 벚꽃이 한창인 경기 용인의 조씨 문중 선산까지 그의 시신을 운구했다.

그뿐 아니다. 조광조의 젊고 안타까운 죽음은 전국 곳곳에 수많은 꽃과 나무로 남겨졌다. 그를 따르던 선비들이 경기도 이천 백사면에 숨어 들어가 심은 산수유는 이제 거대한 군락이 돼 이름난 관광지가 됐다.

그를 그리워하던 나주 출신 성균관 유생 11명이 낙향하여 심은 동백나무도 천연기념물이 됐다. 추운 겨울 붉은 꽃이 피었다가 통째로 떨어지는 것이 그의 꼿꼿한 절개와 닮아 동백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반 고흐 또한 조광조와 같은 나이에 죽었다. 고흐는 그의 생애 마지막 봄에 몇 점의 아몬드 꽃을 그렸다. 이들 중 한 점은 그의 조카가 태어난 소식을 듣고 그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그렸다. 조카의 이름을 '빈센트'라고 고흐의 이름을 붙였다는 동생 테오의 말에 고흐는 감격했다.

그는 아직 정신병원을 퇴원하지 못했기에 대신 그 그림을 보내어 아기의 침실 벽에 걸리기를 원했다.

고흐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순리에 따르는 맑은 정신을 표현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한쪽에 마음의 병과 싸우면서 동생의 지원을 받으며 나아가는 중이었다.

조광조가 유학의 이념으로 제 삶을 지탱하고 사회를 개혁하려 한 반면, 고흐는 삶의 몸짓이 그대로 기록되는 회화를 통해 마음의 고통을 온전히 견디며 남프랑스의 자연이 품은 생명력에 반응했다.

유럽에서 아몬드 꽃은 극동의 매화처럼 제일 먼저 봄을 알리는 꽃이다. 겨우내 냉기를 뚫고 움트는 아몬드의 하얀 꽃은 곧이어 원색으로 다투어 빛날 아를(Arles) 지역의 대지와 하늘을 예고한다.

조광조와 반 고흐는 마치 벚꽃이 일순간에 피었다 지는 것처럼 외부의 도전을 견디며 짧은 삶을 찬란하게 불태운 사람들이다.

나는 삐죽삐죽 올라와 조광조의 묘역을 둘러싸는 아파트촌을 바라보며 내게서 사라진 중요한 것들을 아쉬워했지만 그들의 부재(不在)를 통해 나에게 남은 것들의 귀중함을 보게 되었다.

용인이 벚꽃의 도시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내년 성묫길에 용인의 이곳저곳에 팡팡팡 피어나는 벚꽃 잔치에 참여하고 즐겨야지.


전수경 /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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