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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눈길

눈에도 길이 있다. 보통 한자어로 '시선'이라고 하지만 난 '눈길'이라는 말이 더 정겹다.

텔레비전 광고나 인터넷상 광고들을 자주 접하다 보니 웬만큼 카피가 자극적이지 않으면 눈길을 끌지 못한다. 매번 지루하고 뻔한 수식어나 말장난 같은 문구에 식상해서 감흥도 일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화려하게 핀 수선화 무리나 벚꽃의 풍성함 보다 오히려 한 치도 안 되는 보랏빛의 봄꽃이 눈을 사로잡는다. 화려하고 훌륭한 언변을 구사하는 사람보다 어눌하지만 진심어린 눈빛과 절실함을 지닌 사람의 세련되지 않은 한 마디가 더 가슴에 다가오듯이 말이다. 'Special' 이란 말도 부족해 'Extra-Special' 해야지 특별한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이쁘다 하면 될 것을 까무라치게 이쁘다는 표현을 써야 인물값이 제대로 나오는 것 같으니 큰일이다.

미국 온지 얼마 안 돼 학교를 등록 할 때 필요한 건강진단서를 작성하러 병원에 들른 적이 있다. 혈압이 어떠냐고 묻는 질문에 "Very Normal"이라고 하니 의사가 빙그레 웃는다. 'Normal' 이면 'Normal' 이지 아주 정상이란 말은 없단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를 바라보는 의사와 간호사들의 시선이 무척 따갑게 여겨졌다.

차가울 때나 부정적일 땐 '시선'이란 말을 쓰고 싶고, 부드럽거나 긍정적인 표현을 할때는 '눈길'이란 말을 쓰고 싶다. 그냥 왠지 순수한 우리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요즘 한국에서 만드는 드라마 중 막장 드라마란 것이 있다. 자신의 영욕이나 명예욕을 채우기 위해 다른 이의 삶을 망가뜨리는 모습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재미를 위해 방영된다. 우리의 정서와 걸맞지 않는 것이라고 스스로 믿고 싶지만 어느새 우리의 새로운, 그러나 혼란스러운 정서로 자리 잡은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나는 눈길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 오래 전 떠나온 모국의 지금 모습은 기억 속에는 전혀 없는 형상으로 드라마에서 아니면 뉴스 속에서 등장한다. 들어보지도 못한 각종 흉악한 범죄가 일어난다. 각종 위정자들의 추한 비리가 불거져 나온다. 문학, 예술을 하는 사람들, 심지어 종교계의 인사들까지 역겨운 성추행의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을 본다. 눈길은 자꾸 바닥을 향한다.

눈으로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한다.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는 것은 우리 누구나의 습관일 것이다. 살면 살수록 내 눈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실감한다. 겉으로 봐서 좋은 사람도 겪어보면 아닐 수가 있다. 첫인상은 별로 좋지 않았는데 알고 보면 진솔하고 좋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나도 사람을 다정한 눈길 보다는 차가운 비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잘 안다. 좋으나 싫으나 매번 부딪쳐야 하는 사람과의 만남에서 나의 눈길은 어디로 향해야 할까?

편견은 무지에서 온다고 한다. 상대방을 모르면서 눈이 보는 대로 함부로 판단하고, 눈보다 더 부정확한 귀로 들은 말로 사람의 값어치를 먹인다면 안 될 것이다.

생 텍쥐베리의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비밀을 털어놓는다. 어느 것이든 마음으로 봐야만 잘 보인다고. 원래 중요한 것들은 눈으로 볼 수가 없다고. 내 눈이 자꾸 실수하고, 잘못 보고, 판단 기준을 정하고, 소중한 것을 놓친다면 나는 차라리 눈을 감고 마음을 열어 보련다. 그래서 그 마음의 눈길이 따스하고 정겹고 배려있게 모든 사물을 볼 수 있으면 참 좋겠다.

눈길을 걷는다. 잠시 걷다가 눈을 감고 소리를 듣는다. "뽀득뽀득" 서서히 마음의 눈길이 열리는 착각에 빠져본다.


고성순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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