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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차파 캠프에서 노동 알선사로 큰 활약

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도산 공화국(31)
박충섭 가족①

핸포드서 활동하다가 리버사이드로 이주
LA로 다시 이주할 때까지 파차파서 살아
숙식제공하고 일도 많다고 노동자에 광고
정간 위기 맞은 신한민보 돕기에도 앞장서
매부와 동업해 대형 식료품점 운영하기도
수년간 노력해 한국 모친 미국행 꿈 이뤄
박충섭


박충섭에 대한 최초의 기사는 '공립신보' 1907년 5월 10일 '하변회 보고'다.

'공립신보' 1907년 5월 10일 하변회보고는 "리버사이드회 대리회장 김열일씨의 보고를 거한즉 연한회에 총회를 위하여 연보한 이의 씨명과 금액의 수효는 왼쪽과 같고, 본회 회원 박영순씨가 상항 회원 최춘흥씨와 쟁투한 일에 대하여 박씨를 벌금 5원에 처하였고 또 본 회관을 이설하고 간사는 김기만씨가 피임이라"라고 적고 있다.

'위총회 의연 제씨' 명단에 박충섭이 1원을 냈다고 되어 있다. 또한 공립신보 1907년 6월 14일자는 "하변회보고. 리버사이드 지방회장 김영일씨의 보고를 거한즉 신입한 회원은 리근술.김순학 양 씨오, 상항회에서 이래한 회원은 김달노.마춘봉.박충섭 3씨오…"라고 게재했다.



박충섭은 샌프란시스코에 있었다가 리버사이드로 이주했다. 이후 박충섭은 핸포드 지방 재류 회원으로서 핸포드 지방회 신설 청원에 참여했다. 그는 근처의 프레즈노에서 일하기도 했다. 박충섭은 핸포드에 있는 동안 그곳 지방회에서 활동했다. 1909년 초에 박충섭은 레드랜즈로 이주한다. 박충섭은 1910년 무렵 다시 리버사이드로 이주했다.

신한민보 1910년 5월 11일자 "광고. 화재에 구제한 여러분 하변" 기사에서 레드랜즈 화재에 리버사이드 지방회에서 연조를 모금했는데 박충섭은 기부자들 중 가장 많은 금액인 10원을 기부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클레어몬트 학생양성소에 풍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박충섭은 이후 나성으로 이주할 때까지 리버사이드에 거주한다. 1913년부터는 파차파 캠프에서 노동 알선사로 활동했다.

신한민보는 박충 씨가 노동 주선인으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신한민보 1913년 11월 28일자에는 "노동 주선 광고. 본인이 금년부터 리버사이드에서 노동 주선을 하는바 숙식도 편리하옵고 일도 많이 얻을 터이오니, 노동에 주의하시는 동포들은 다 오시기를 바라나이다. 리버사이드 노동 주선인 박충섭 고백"이라고 게재돼 있다.

리버사이드 지방회는 1915년 신한민보의 재정이 궁핍하여 정간할 위기에 처하자 공동회를 열고 그 일에 대한 의논했다. 리버사이드 동포들은 일자리 문제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고 노동 주선인 박충섭 또한 그러한 동포들을 돕느라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신한민보가 정간 위기를 맞자 동포들로부터 의무금을 받아내는 역할을 맡는다. 신한민보 기사를 통해서 당시 박충섭씨는 당시 파차파 캠프 한인 노동국 노동알선사로 일하면서 큰 역할을 담당한 것을 알 수 있다.

박충섭은 리버사이드에서도 사업을 크게 했다. 박충섭은 매부인 구정섭과 동업하여 리버사이드에서 식료품 상점을 크게 운영했다고 신한민보 1927년 8월 11일자는 보도했다.

모친 박상순

구애주의 어머니이며 구애주의 오빠 박충섭의 어머니는 전주 사람으로, 이름은 박상순이다. 박충섭은 모친을 1922년 한국에서 리버사이드로 모셔 오기도 했다.

신한민보 1922년 10월 19일자는 "박충섭 씨 모친 도미. 리버사이드에 다년 류하며 농업을 하는 박충섭 씨의 모친은 거월에 상항에 무사히 상륙하여 수일 본 항에서 류하다가 리버사이드로 나아갔더라. 씨의 모친은 당년이 60여라. 그 노친을 모셔 오기로 다년 뇌심하며 재정을 소비하며 여러 방편으로 주선하였고, 그 모친도 십여 년 동안 이별한 자제를 만나기를 일구월심에 생각하던바 월전에야 비로소 여행권을 얻어 도미하게 되었더라"라고 적고 있다.

박충섭의 모친은 박상순으로 1926년 리버사이드에서 찍은 생일잔치 사진이 LA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신한민보 1943년 11월 11일자는 박상순의 장례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18세에 남편의 박홍식과 혼인하여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다고 했다. 중년에 과부로 살면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 어머니 박상순 여사의 장례는 "장로교 예배당으로부터 발인하여 수십 대 자동차와 백여 인 호상" 속에서 이루어졌고 관은 '로스데일' 묘지에 묻혔다.

<32회로 계속>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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