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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신부 출신 부인 박정경 여성단체 주도

[LA중앙일보] 발행 2018/04/30 미주판 8면 기사입력 2018/04/29 15:51

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도산 공화국(32)
박충섭 가족②

박씨 부부의 묘비.

박씨 부부의 묘비.

델라노서 일인상점 보이콧 주도
국민회 델라노 집행위원장 활약

동생 박영섭 결혼에 아버지 역할
아들 결혼에는 델라노서 큰 잔치




◆박충섭 가족

박충섭씨 가족사진(왼쪽). 박씨 부부와 딸 글로리아 박(인숙). 박정경 여사로 추정되는 인물과 3형제(오른쪽).

박충섭씨 가족사진(왼쪽). 박씨 부부와 딸 글로리아 박(인숙). 박정경 여사로 추정되는 인물과 3형제(오른쪽).

박충섭은 1931년 LA로 이주하였는데 그 곳에서도 과채 상점을 운영했다. 박충섭이 이주하면서 노동한 상황을 통해 당시 한인 노동자들의 삶을 살펴 볼 수 있다. 대부분의 한인 노동자들은 계절 이주 노동자들로서 농작물을 따라 이주하면서 노동을 했다.

박충섭은 1908년 리버사이드에서 핸포드로 이주했다가 잠깐 프레즈노에서 포도를 땄다. 그리고 다시 핸포드에서 실업회사를 설립했다. 또 다시 레드랜드로 이주했다가 1910년 리버사이드에 정착했다가 또 다시 1931년 LA로 이주해서 과일과 야채 상점을 운영했다. 1938년 중가주 델레노로 이주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박충섭은 대한인국민회 델라노(Delano)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고 여관도 운영했다. 델라노에서 박충섭은 델라노 지방회 총무를 맡았고 일인 상점의 보이콧에 앞장섰다.



◆아내 이정경(박정경)

1915년 박충섭은 이정경과 결혼하는데 아마 사진 신부가 아닌가 추측된다. 이정경이 만주리아호를 타고 미국에 도착했다는 '신한민보' 기사가 있다.

이정경은 박충섭의 '새색시(신인)'라고 쓰여 있다. '신한민보' 1915년 8월 5일자는 박충섭과 이정경의 결혼식과 신혼여행 소식을 전하고 있다.

"박 씨의 신혼과 여행. 리버사이드에서 다년 노동 주선에 종사하는 박충섭 씨는 내지로써 신도한 이정경 여사로 더불어 7월 28일에 본 항 한인 예배당에서 혼례식을 행하고, 그 밤에는 본 항 일반 부인 신사를 청하여 연회를 성대히 열었으며, 본월 1일에는 그 신부를 대동하고 본 항을 떠나 남방으로 행하여 리버사이드에 가서 본월 7일에 당지 동포와 외국 빈객을 청하여 다시 성대한 잔치를 할 예정이라더라."

박충섭의 부인이 해산 후 별증과 맹장염으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신한민보' 기사도 눈에 띈다.

박정경은 1930, 1940년대에 대한 독립을 위한 여성단체에서 활동하고 기금을 연조했다. 1933년에는 나성 여자 청년회가 만둣국을 비롯한 한국식의 성대한 만찬을 차리고 국제 여자 청년회 임원과 장로교회에 도움을 주는 부인들을 초대하여 식사했다. 이때 박정경은 안혜련을 비롯한 부인들과 더불어 음식을 손수 장만했다. 박정경은 여자 애국단 나성 지부에서 재무를 맡았다. 또한 박정경은 대한 여자 기독 청년회에서 서기를 맡았다. 박정경은 장병들의 겨울 솜옷을 위해 기금을 의연했다는 '신한민보' 1939년 12월 7일의 보도도 눈에 띈다.

◆남동생 박영섭

박충섭의 남동생 박영섭은 1917년 중국 선편을 타고 입항했다. 박영섭은 리버사이드에 있는 중학교에서 전기과와 목공과를 공부했는데 성적이 좋았다고 신한민보는 보도했다. 박영섭은 1924년 LA로 이주하여 공부를 계속했다. 1927년에 있었던 박영섭과 김윤원의 결혼식은 상세하게 보도되었다. 이 결혼식 때 박영섭의 형인 박충섭이 감사말을 내빈에게 드렸는데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한 것이다. 박충섭의 부인 박정경은 신부를 돕는 보모 역할을 하였다. 결혼식이 추수감사절에 있어서 터키를 저녁으로 먹었다고 한다. 박영섭은 리버사이드에서 1928년에 딸을 보고 1930년에 아들을 보았다.

'신한민보' 1928년 9월 6일 보도에는 "박영섭 씨의 농와지경. 리버사이드에 거류하는 박영섭 씨는 그의 귀로운 첫딸을 보았다더라"라고 적고 있다. 또 '신한민보' 1930년 12월 25일자는 "리버사이드 박영섭씨 득남"이라고 보도했다.



◆박충섭의 자녀들

박충섭의 장자 박운하는 1943년 한시대의 딸 한유희와 혼인했다. 아들의 결혼으로, 박충섭과 박정경은 델라노에 사는 이웃 전체에 큰 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에게 한국 음식을 대접하였는데 이 음식은 이웃들이 도와서 함께 만든 것이다. 박충섭의 첫째 아들 박운하와 둘째 아들 박운용은 모두 군에서 복무했다. 박운하는 결혼 직후 미군에 입대하여 부인과 함께 상항에 있다가 델라노로 귀환했고 박충섭의 셋째 아들 박운선도 징병에 뽑혀갔다가 휴가를 얻어서 델라노에 돌아왔었다. 박충섭의 둘째 아들 박운용과 딸 박인숙이 자동차 사고를 입었다.

'신한민보' 1941년 2월 13일자에는 "박충섭씨 동부인 염려. 뗄레노에 재류하는 박충섭 씨 동부인의 차자 운용 군과 령애 인숙 여사의 자동차 충돌의 피상은 일찍이 보도한바 운용 군은 그동안 완치를 얻어 퇴원하였고 인숙 여사는 아직도 위경에 있으므로 박충섭 씨 동부인은 염려를 말지 않는다더라. 뗄레노 통신. 전하는 것은 점점 차도가 있으므로 불원간 퇴원할 터이라고 한다"라고 보도했다.

<33회로 계속>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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