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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창] 인질과 볼모의 국제 정치

[LA중앙일보] 발행 2018/05/11 미주판 22면 기사입력 2018/05/10 19:15

#. 북한에 억류돼 있던 한국계 미국인 세 명이 석방되어 돌아왔다. 북한은 이들을 모두 간첩이나 적대행위 혐의로 체포했었지만 사실상 인질이었다.

누군가를 인질로 삼는다는 것은 대항 능력이 없는 민간인을 강제로 억류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비겁하고 졸렬하다. 그럼에도 테러단체나 소말리아 해적 같은 불법 집단, 심지어 도둑이나 강도같은 잡범들까지 곧잘 인질극을 벌인다. 석방 협상을 통해 나름대로 효과나 재미를 보기 때문이다. 북한이 툭하면 미국인을 억류했던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역사를 읽다 보면 인질과 비슷하면서도 성격이 다른 '볼모'가 자주 등장한다. 인질이 약자가 강자를 상대로 싸울 때 쉽게 유혹받는 방법이라면 볼모는 강자의 요구에 따라 약자가 어쩔 수 없이 응해야 한다는 차이가 있다. 병자호란 때 조선의 항복을 받은 청나라가 인조의 두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데려간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멀리 원나라에 가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고려 왕자들도 볼모로 고통을 받았다. 나중엔 돌아와 왕위를 이었지만 충렬-충선-충숙-충혜-충목-충정왕 등과 같이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뜻의 충성 충(忠)자가 들어간 시호까지 받아 써야 했다. 강대국에 억눌린 약소국의 설움이었다.

'볼모 왕자' 이야기는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신라 초기 내물왕의 두 아들이자 눌지왕의 동생인 미사흔과 복호는 오랜 세월 왜(일본)와 고구려에 볼모로 붙잡혀 있었다. 그때 박제상이란 사람이 고구려로 넘어가 장수왕을 설복해 복호를 구해왔다. 이어 왜국으로 건너가 미사흔도 탈출시키지만 끝내 자신은 붙잡혀 처형당한다.

이때의 장면은 삼국유사에도 생생히 전한다. 왜왕이 박제상에게 신하가 될 것을 요구하자 "내 비록 계림(신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답하며 장렬하게 죽었다는 것이다. 신라 최고의 충신이자 애달픈 '망부석' 전설의 주인공 박제상은 그렇게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 인질이든 볼모든 비인간적이고 비상식적이라는 점에선 똑같이 비열한 죄악이다. 대부분 국가들이 '인질의 목숨을 담보로 한 거래엔 응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포로 석방이나 몸값 지불, 정책 변경 같이 테러 집단이 요구하는 조건은 절대 들어주지 않는다.

물론 미국인이 억류당했을 때마다 고위급 인사 파견 등 다각도의 물밑 협상으로 인질을 구해온 경우가 있긴 했다. 그래도 북한에 대해서는 줄곧 악의 축 내지 테러집단으로 규정해 왔던 만큼 표면적으로는 이 원칙을 포기하진 않았다.

이번엔 달랐다.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두 번이나 평양을 방문하면서 억류 미국인 석방 문제를 대놓고 협상 테이블에 올렸다. 테러집단과는 어떤 거래도 않는다는 원칙의 파기라 할 만큼 파격이었다. 북한을 정상 국가로 인정해 비핵화를 끌어내겠다는 미국의 의지가 그만큼 확고하다는 것이 읽히는 대목이다.

북한 역시 이에 화답해 억류자 조기 석방이라는 선물을 안김으로써 트럼프 대통령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대미 협상카드로 끝까지 '인질'을 활용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회담 일정이 다음달 12일 싱가포르로 확정됐다. 이미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불량국가 이미지를 털고 현실 세계로 나오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정상 국가로 대접받고 싶은 바람은 북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이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이제 더 이상 비인도적인 인질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억류 중인 한국인 6명도 조속히 돌려보내야 한다. 정상 국가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핵이나 탄도미사일이 아니라 이런 상식적인 조치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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