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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총력특집] 수령 독재국가, 개혁·개방 물결 이겨낼까

이영종(lee.youngjong@joongang.co.kr)
이영종(lee.youngjong@joongang.co.kr)

[한국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8/05/24 08:06

70년 혈통세습과 유교적 복종문화가 안전판

비핵화 담보로 국제사회 봉쇄 뚫어야 경제 부흥 물꼬 … 중국·베트남과 다른 세습 왕조에선 체제 명운을 건 모험일 수도


북한 당국이 조성에 심혈을 기울이는 평양 려명거리에 초고층 아파트가 속속 들어서고 있다. / 사진캡처·노동신문

북핵 문제 해법 도출을 위한 북한과 미국의 줄다리기가 중대 국면을 맞고 있다.

북한이 미국의 대북 제안에 대해 ‘새로운 대안’이란 평가를 내놓고, 미국 측은 북한의 비핵화 입장 표명에 대해 연일 긍정적인 반응과 함께 당근을 꺼내 들고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간의 교감과 함께 의기투합까지 이뤄진 징후가 감지되고 있다. 북한 조선중앙TV는 5월 9일 이뤄진 폼페이오 장관의 김정은 면담 소식을 7분짜리 영상으로 만들어 방영하면서 “김정은 동지께서 트럼프 대통령이 조·미 수뇌 상봉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데 대해 높이 평가하고 사의를 표했다”고 전했다. 영상에는 폼페이오가 김정은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는 장면도 등장한다. 김정은을 ‘최고존엄’이라 떠받들며 숭배하는 북한 관영매체가 이런 모습을 여과 없이 방영하는 건 이례적이다.

미국 등 국제사회의 대북(對北) 선물보따리도 그 품목과 물량이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북한을 비핵화하기 위한 대북 타진 시점에서 에너지와 식량 지원 같은 방안이 논의되던 차원에서 금융·인프라 등으로 차원 높은 보상이 거론된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아예 “미국은 북한이 우리의 우방인 한국과 같은 수준의 번영을 달성하도록 협력할 준비가 돼 있다”는 발언까지 했다. 강경화 외교장관과 5월 11일 가진 한·미 외교장관 기자회견에서다. 김정은이 올바른 길을 선택할 경우 “북한에 평화와 번영으로 가득한 미래가 있을 것”이란 장밋빛 청사진도 제시했다. 이를 두고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이행을 조건으로 북한판 마셜 플랜이 작동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김정은에게 보낸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지난해 5월 평양 시민들이 대형 스크린을 통해 준중거리 탄도미사일 ‘북극성-2형’의 시험발사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여기에 우리 정부의 대북 인프라 건설 구상까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양상이다. 정부는 대통령 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회를 통해 철도·항만과 가스·전력망 구축을 골자로 한 ‘신 북방정책 로드맵’을 마련해 놓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일본~남북한~중국·러시아를 잇는 철도망과 항로 연결은 북한에 엄청난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줄 수 있는 프로젝트로 꼽힌다.

물론 이런 미국 측의 제안이 현실이 되려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약속이 철저하게 이행돼야 한다. 폼페이오 장관도 북한 비핵화 문제에 대해 “강력한 검증 프로그램이 요구될 것”이라며 북한의 핵 포기를 검증하는 과정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보다 구체적인 북핵 폐기 수순을 공개하며 북한을 압박하는 형국이다. 폼페이오의 대북 인프라 지원 발언이 나오던 날 볼턴 보좌관은 “비핵화 절차가 완전하게 이행돼야 하고 불가역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는 (북한의) 모든 핵무기를 제거하는 것이며, 핵무기는 폐기해 테네시주 오크리지로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2005년 리비아가 포기한 핵과 관련 자료 등이 이관돼 있는 오크리지를 북한 핵의 최종 폐기를 위한 무덤으로 지목한 것이다.

김정은 50년 집권 플랜과 미국 관계 개선

2012년 7월 북한 모란봉악단의 공연에 처음 등장한 미키마우스 캐릭터.

북한과 미국이 북핵 폐기 문제와 관련해 어떤 의견 접근을 이뤘고, 이견은 어느 대목인지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양측 모두 긍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상당한 진전을 이룬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면서도 김계관 외무성 제1 부상의 예처럼 리비아식 핵포기 방식에는 경기를 일으킨다. 하지만 뭔가 이전의 틀과는 다른 주고받기가 최고지도자 수준에서 진행 중이란 점은 분명해 보인다. 한·미 대북 공조 채널을 통해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는 우리 정부 극소수 당국자와 자문그룹 핵심 인사 외에는 대북부처와 전문가들이 국면 분석과 전망에 애를 먹고 있는 것도 이런 측면에서다. 물론 현재로서는 북한과 미국 사이에 전에 찾아보기 힘들었던 소통과 의견 교류가 이뤄지고 있고, 절대 좁혀지거나 논의 테이블에 오르기 힘들어 보였던 사안들에서 접근이나 합의가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관건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다. 미국이 제시한 당근 보따리를 챙겨 북한 체제를 보장받고 경제적 부흥을 꾀할 것이냐, 아니면 북한 핵과 미사일을 거머쥔 채 다시 지루한 협상이나 벼랑끝 전술 쪽으로 치달을지는 전적으로 북한의 선택하느냐에 달렸다.

일단 김정은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싱가포르 담판을 통해 비핵화와 ‘북한 체제보장+α’를 챙기는 선택을 할 공산이 커 보인다. 지난해 9월 6차 핵실험과 수차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도발을 통해 11월 말 이른바 ‘국가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한 김정은에겐 2018년 대미협상의 시간표가 그려져 있었을 게 틀림없다. 지난 1월 신년사를 통해 남북관계 개선 메시지를 보내고, 평창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특사를 파견해 문재인 정부와의 대화 물꼬를 튼 것도 이런 빅픽처를 만들어 내기 위한 도약대였다는 얘기다. 4·27 남북 정상회담과 판문점 합의는 싱가포르에서의 북·미 담판을 위한 탐색전의 성격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합의문에서 ‘한반도 비핵화’로 뭉뚱그려진 북핵 관련 합의를 구체화하는 담판이 향후 북한 체제의 명운을 좌우할 수 있다는 점도 김정은이 모를 리 없다.


2014년 평양 어린이들도 미키마우스 캐릭터 가방을 멘 모습이 포착됐다. / 사진제공·스티브 슈이트

김정은 위원장은 집권 6년 동안 핵과 미사일 도발, 대내적인 권력 기반 다지기, 경제건설 구상 제시와 추진 등의 노정을 거치며 적지 않은 시행착오와 일부 성과를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 리더십 발휘와 체제 유지에 자신감을 가진 것 같다는 분석도 있다. 이를 토대로 자신의 50년 집권 플랜을 짜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대목에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은 체제 생존을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김일성과 김정일 정권을 거치며 북한이 70년 넘게 ‘철천지원수’로 여겨 온 미국을 향해 ‘체제 안정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과 맞닥뜨린 것이다. 그만큼 대북제재 속에서 체제 위기감을 느꼈고, 이번 기회를 체제 보장을 위한 북한식 ‘판갈이 전투’의 계기로 삼았을 것이란 추론이다.

북한이 ‘조선반도 비핵화’라는 애매한 주장이 아니라, 한·미와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수준의 ‘핵 폐기’를 실제로 이행할 수 있을지는 아직 단정하기 어렵다. “우리 공화국이 핵을 포기할 것을 바라는 것은 바닷물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짓”(2월 23일자 [노동신문])이라던 북한이 정말 바다를 말려 버리는 이변을 연출할 것인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집권 5년 만에 경제·핵 병진노선 포기 선언

뉴욕 맨해튼 5번가의 트럼프 타워. 평양에도 트럼프 타워가 들어설지 관심을 모은다.

하지만 김정은이 이미 호랑이의 등에 올라탄 형국이다. 문재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이어 트럼프와의 담판 테이블까지 마련하는 쪽으로 판을 키울 대로 키운 상황이라 되돌리거나 판을 깰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김정은의 손을 떠나 한반도와 국제 정세의 흐름에 따라 엄청난 에너지를 품고 굴러가는 수레바퀴를 보는 듯하다는 해석도 나온다.

평양의 트럼프타워나 맥도날드 매장이 현실화한다는 건 북한 체제가 돌이킬 수 없는 개혁과 개방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할 수 있다.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이 ‘주체 혁명의 수도이자 성지’로 선전되는 평양 중심부에 자리한다는 점에서다. 변화를 보는 3단계 지표 중에서 상징적 변화와 의미 있는 변화를 넘어 본질적 변화를 꾀하는 수준에 진입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는 평가도 있다.

사실 김정은 위원장은 집권 초기부터 북한 체제를 개혁·개방할지 모른다는 기대를 모았다. 집권 첫해인 2012년 7월 부인 이설주를 대동하고 관람한 모란봉악단 창단 공연 무대에는 미키마우스와 곰돌이 푸 같은 미 월트디즈니의 캐릭터가 대거 등장했다. 무대 배경 화면에는 백설공주 영상이 나왔고, 각종 외국산 전자악기를 동원한 악단 멤버들은 미국 할리우드 영화의 주제가를 부르기도 했다. 이를 두고 서방의 대북 관측통들은 “어릴 적 스위스에서 유학한 김정은이 개혁·개방에 나설지 모른다”는 기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듬해 12월 고모부 장성택을 무참하게 처형하는 등 잔혹한 모습을 드러내고, 이어 핵과 미사일 도발 노선을 걸으면서 김정은의 이미지는 김일성과 김정일에 못지않은 폐쇄적이고 호전적인 북한 최고지도자로 낙인됐다.

물론 김정은도 민생 챙기기와 북한 경제난 극복을 위한 메시지를 주기적으로 제시했다. 집권 100일을 갓 넘긴 2012년 4월 15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한 첫 연설에서 그는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게 하자는 것이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이라고 공언했다. 이후 야심찬 개혁 구상을 내놓기도 했다. 같은 해 6월에는 노동당이 통제하는 공장·기업소 등 경제 단위에 자율권을 대폭 확대하는 것을 골자로 한 6·28 개혁 조치를 내부적으로 시행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5월에는 경제개발구법을 만들어 중앙급 경제특구(5개)와 지방급 경제개발구(22개) 등 모두 27곳을 지정했다. 2013년 3월 말엔 노동당 전원 회의를 통해 ‘경제·핵 병진노선’을 제시하기도 했다. 핵보유로 재래식 무기인 전차와 함정·전투기 등을 구입하는 비용을 줄일 수 있게 됐으니, 국방비를 인민이 먹고사는 문제와 사회보장에 투입하겠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핵 개발과 탄도미사일 발사에 무게가 실린 병진노선은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미국 주도로 한층 깐깐해진 대북제재는 해상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던 유조선 환적 행위까지 포착해 추적했다. 중국마저 등을 돌리면서 산소호흡기까지 떼인 신세가 된 북한 경제에는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최근 수년간 최고인민회의가 발표한 북한 예산 집행 결과에 따르면 16% 수준의 국방비(실제로는 은닉예산을 포함해 30% 정도일 것으로 정부 당국은 추산) 비중은 병진노선 제시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다. 김정은이 5년 만에 경제·핵 병진노선의 포기를 선언하고 경제에 매진하겠다고 밝힌 것도 이런 속사정 때문이다.

개혁·개방 노선은 유일지배 체제의 산물?

평양 금수산궁전 앞을 지키는 북한 경찰. 당초 의사당을 궁전으로 재명명한 것은 개인 우상화의 일환으로 이해된다.

김정은이 개혁·개방 노선을 선택한다는 건 체제의 명운을 건 모험일 수 있다. 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업한 지 70년 동안 한 번도 가지 않을 길을 가는 것이란 점에서다. 물론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사회주의 개혁·개방의 노선을 택한 전례가 없지 않다. 하지만 3대에 걸친 세습방식의 왕조 체제란 점에서 김정은이 느낄 위기감은클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개혁·개방의 길을 택할 경우에도 김정은이 북한 체제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이끌어 가거나 통제 가능하도록 할 요인은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70년 넘도록 유지돼온 철저한 수령 독재와 유일지배 체제란 특성을 꼽을 수 있다.

김일성에서 김정일을 거쳐 김정은으로 이어져 온 혈통세습 방식의 권력 시스템은 특유의 통제 체제를 작동시켜왔다. 김일성에 대한 유일지배체제 확립은 수령론과 계속혁명론 등을 매개로 철저하고 계획적인 승계 준비를 가능케 했고 오랜 기간 후계수업을 받은 김정일은 김일성의 사망 직후 곧바로 권력을 안정적으로 넘겨받는 결과를 낳았다. 김정일은 또한 이 같은 경험을 아들 김정은으로의 권력승계가 가능토록 하는 데 활용했다. 권력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던 김정은은 이복형 김정남과 친형 김정철을 후계 경쟁에서 밀쳐내고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노동당과 군부 엘리트에 대한 철저한 감시와 주민 통제체제, 폭압적 공안 시스템 등은 권력에 대한 도전 요소를 제거하고 안정성을 다지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는 유교적이고 봉건적인 주민 의식과 수령 숭배 제도가 운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은 김일성 사망 1주기인 1995년 7월 8일 그가 생전에 집무실로 사용하던 금수산의사당을 ‘금수산기념궁전’으로 재명명하고 개관하는 행사를 열었다. 북한이 사망한 김일성의 집무실을 ‘궁전’으로 명명했다는 점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사회주의에서는 좀체 찾아보기 힘든 봉건왕조 성격의 선대수령 숭배 움직임의 단초라는 측면에서다.

탈북·망명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북한에서 봉건왕조 형태의 수령 독재가 가능했던 요인을 민주주의 정치·문화가 부진했던 북한 사회의 특성으로 꼽았다. 그는 저서 [어둠의 편이 된 햇볕은 어둠을 밝힐 수 없다]에서 “민주주의 정치·문화 수준이 맞고 봉건 잔재가 많이 남아 있는 나라일수록 수령에 대한 개인 우상화가 더 강했고, 수령의 개인 독재가 더 거침없이 실시됐다”고 조망했다. 나아가 “이 점에서 봉건 잔재가 가장 많이 남아 있던 북한에서는 처음부터 수령에 대한 개인 우상화가 그 어느 사회주의 나라에서보다 더 혹심했으며 개인 독재가 강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이 유교적 전통문화 속에 통치자와 인민을 군신의 관계로 받아들이고 권위에 복종함으로써 세습승계의 부당성에 대해 아무런 저항 없이 순응하는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는 얘기다.

셋째, 구소련과 동구 국가의 붕괴 등 사회주의 체제 몰락을 통해 국가 권력 유지를 위해 어떤 위기요인을 제거하고 극복해 나가야 하는지를 터득했다는 점이다. 특히 북한은 핵 프로그램을 추진했거나 핵을 보유했던 국가가 이를 포기하거나 협상카드로 섣불리 내놓았다가 체제붕괴를 맞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미국과의 북핵 협상 과정에서 핵 포기와 단계적이고 동시적인 상응 조치를 강조하고, 트럼프 행정부로부터 완전한 체제 보장과 과감한 대북 인프라 지원 같은 보상을 얻으려 하고 있는 것도 이런 교훈 때문이란 분석이다.

북한 장마당, 체제의 고민을 응축하다

지난해 평양 봄철국제상품전람회장을 둘러보며 상품을 구입하는 평양 시민들.

김일성은 1950년대의 스탈린 격하운동을 비롯한 사회주의권의 권력승계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고자 했다. 김정일은 1990년대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 붕괴의 충격을 직접 체험하고 난 이후 부자세습을 가능하게 할 동인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김정은은 소련 붕괴와 동구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이 벌어지던 시점에 6∼7세의 어린 나이였다. 당시 상황에 대해 어떤 생각이나 가치관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사회주의권 붕괴와 관련한 북한 체제의 위기감이나 김일성·김정일이 겪은 스트레스를 간접적으로 경험했을 것이란 점에서 향후 개혁·개방이나 체제 변혁의 과정에서 사회주의 붕괴를 반면교사로 삼을 가능성이 있다.

넷째는 중국의 강력한 후견과 지원이다. 김정은으로서는 자신이 권력기반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중국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관계를 설정할지에 상당히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북·중 관계를 두고 ‘산과 물이 잇닿은 인방(隣邦)’이라며 혈맹관계를 강조해 왔다. 하지만 중국이 북한에 개혁·개방으로 나설 것을 촉구한 데 이어 2006년 10월 북한의 핵 실험 강행에 불쾌한 감정을 드러낸 중국 지도부가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에 참여함으로써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중국은 김정일 사망 10개월 전인 2011년 2월 방북한 멍젠주 국무위원 겸 공안부장을 통해 “조선노동당 대표자회에서 김정일 동지께서 조선노동당 총비서로 추대되고 김정은 동지께서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대돼 조선혁명의 계승 문제가 빛나게 해결된 데 대해 열렬히 축하한다”고 밝혔다. 북한에 대한 중국 당과 정부의 신뢰가 변함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지난해 북한의 6차 핵 실험과 잇단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도발에도 불구하고 김정은이 지난 3월 말과 5월 초 잇달아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과 공조를 과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선뜻 체제의 문을 열어 젖히기엔 고민되거나 위기의식을 느낄 요소도 만만치 않다. 개혁·개방과 관련한 김정은 체제의 고심을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건 북한 장마당 경제다. 장마당은 지난 20여 년간 북한 주민들의 생활을 지탱하게 해준 응급실 역할을 했다.

북한 경제가 본격적으로 장마당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건 1990년대 중·후반 대홍수가 닥치면서 이른바 ‘고난의 행군’에 들어선 때부터다. 식량부족 등으로 국가배급망이 붕괴했고, 대량 탈북 사태가 발생하는 등 체제위기까지 겪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당시 굶어 죽은 사람이 전체 인구 2400여 만 명 가운데 200만~300만 명(우리 정보 당국은 46만 명으로 추계)에 이른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처음엔 농민시장 형태를 띠었다. 협동농장이 아닌 텃밭이나 뙈기밭에서 기른 배추, 감자 등 농작물을 내다 팔았다. 이후 점차 옥수수빵이나 국수 같은 쪽으로 폭을 넓히더니 최근에는 거래 품목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과자와 비누·칫솔·샴푸 같은 생필품이 등장해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전언이다. 초코파이와 믹스커피, 천하장사 소시지 등 한국 제품도 거래된다는 얘기다. LED TV와 냉장고·세탁기까지 부유층 사이에서 은밀하게 팔린다고 한다.

500만 대 휴대전화의 통제 가능할까

북한의 스마트폰 길안내 앱 ‘길동무’는 평양 주요 시설의 위치와 각종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북한 주민의 평균 월급은 3000원 수준이다. 공식 환율이 달러당 150원 정도니 20달러쯤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암달러 거래가 만연하면서 달러당 8000원 수준으로 거래된다. 암달러 기준 50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월급은 그저 ‘상징적 임금’이란 인식이 퍼지면서 사회 부작용이 속속 생겨났다. 무엇보다도 비공식 수익활동과 뇌물이 성행하고 있다는 게 탈북자들의 증언이다. 기관 소속 차량을 몰래 운행해 돈벌이를 하거나 공장 부품을 하나둘 빼내 조립해 시장에 파는 건 대표적인 사례다. 김일성대와 김형직사범대 같은 명문대 교수들은 과외시장에 뛰어든다. 고위 탈북인사는 “3~5명 정도를 가르치는데 시간당 각기 1달러가량을 받는다”고 전했다. 장마당 허가권과 입시·취업·승진 등 사회 전반에 뒷돈과 뇌물이 성행하는 것도 결국 월급으론 살 수 없는 현실 때문이란 분석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주민들 사이에서 “노동당보다 장마당”이란 말이 입에 오르내린다고 한다. 조선노동당은 민생을 내팽개쳤지만 장마당은 숨통 역할을 해 준다는 의미다. 달러의 맛에 빠진 주민들은 “미국 할아버지(100달러에 새겨진 벤저민 프랭클린을 지칭)가 최고”라고 여긴다고 한다. 중국 할아버지(100위안에 그려진 마오쩌둥)에 이어 ‘수령님’(북한 화폐의 김일성을 지칭)이 제일 마지막이란 비아냥이다.

북한에 최대 500만대 가까이 보급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 휴대전화도 김정은 체제의 변화와 개혁·개방을 이끌어 갈 요인으로 지적된다. 외부세계의 정보를 유입시켜 확산토록 하는 매개체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2002년 첫 서비스 시작 때 ‘손전화’로 선을 보인 이후 최근에는 ‘평양타치’란 이름의 스마트폰으로까지 변신하고 있고 일반 주민들에게까지 필수품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모바일에 대한 통제가 허물어질 경우 엘리트 세력의 체제 이반이나 반체제 세력의 등장이 새로운 위협으로 부상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정은이 개혁·개방으로 나설 수 있을지는 그가 미국과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비핵화 문제에 대해 얼마나 진정성 있는 태도를 취하고 실제 이행하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현재로선 김정은이 비핵화 문제와 관련해 어떤 복안을 갖고 있는지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폼페이오 대북특사의 방문과 물밑 조율과정을 통해 뭔가 빅딜이 이뤄질 것이란 기대감이 높아져 있지만 김계관 부상 반발에서 보여지듯 실제 북·미 정상회담 테이블이나 이후 벌어질 북핵 폐기 줄다리기 과정에서 어떤 돌출변수가 도사리고 있을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확실한 건 미국이 북핵 폐기를 전제로 북한이 매력적이라 생각할 수준의 엄청난 선물 리스트를 제기하고 있고, 북한이 만족감을 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폼페이오 장관은 북한이 핵 프로그램의 완전해체에 동의했다고 전하면서 대북제재 해제와 북한에 대한 미국 자본의 투입을 공언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고기를 먹을 수 있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일성이 주민들에게 약속했지만 공수표가 된 ‘쌀밥에 고깃국을 먹는 지상낙원’이 미국에 의해 현실로 다가올 순간이 닥친 것이다. ‘더 이상 허리띠를 조이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던 김정은이 어떤 선택을 할지 주목된다.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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