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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최초 한인타운' 발굴이 큰 의미

[LA중앙일보] 발행 2018/05/29 미주판 8면 기사입력 2018/05/28 15:36

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
도산 공화국 연재를 마치며

1907년 독립운동을 위해 한국으로 갔던 안창호가 1911년 리버사이드로 돌아온 후, 파차파 캠프에서 대한인국민회 북미 총회가 개최됐다. 북미에서는 최초로 지방회장 전원이 참석하며 대한인국민회의 단합을 과시한 행사였다.

1907년 독립운동을 위해 한국으로 갔던 안창호가 1911년 리버사이드로 돌아온 후, 파차파 캠프에서 대한인국민회 북미 총회가 개최됐다. 북미에서는 최초로 지방회장 전원이 참석하며 대한인국민회의 단합을 과시한 행사였다.

파차파 캠프는 단순한 타운 아니고
미주 한인 독립운동 중심지 역할

도산 안창호의 업적 재조명도 보람
진보와 보수 통합하는 지도력 갖춰

연재에 보내준 독자들 성원에 감사
먼곳서 파차파 찾는 한인들도 많아


도산 안창호가 1904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리버사이드로 이주하여 개척한 미국 최초, 그리고 그 당시 최대의 한인타운인 파차파 캠프 또는 도산 공화국에 관한 연재를 지난 35주 동안 무사히 마쳤다. 우선 매주 월요일 전면을 할애해 준 중앙일보에 감사드린다.

지난 35주 동안 연재하면서 많은 분들께서 "잘 읽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자료들을 찾으셨나요?"라며 격려와 관심을 보여 주었다. 대한인국민회 주최 세미나에서도 초청을 받아 파차파 캠프 특강시간도 가졌고, 멀리 샌디에이고 독자들이 도산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리버사이드를 방문하여 도산의 동상이 있는 곳과 옛 파차파 캠프 지역을 둘러보기도 했다.

이 연재를 통해 초기 한인 사회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페이스북에도 연재했는데 독자들이 "다음 연재 기대할께요" "교수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열정적인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등 격려의 글들을 남겼다.

개인적으로 참 보람 있는 연구 작업이었다. 새로운 자료 하나 하나를 발굴하면서 희열을 느꼈고 초기 한인 이민자들의 숨결을 느끼는 듯했다. 역사는 "객관적 자료 또는 사료"가 있어야 증빙되지만 또한 중요한 것은 연구자의 관점이다. 역사는 역사 학자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연구 작업의 가장 큰 의미는 단연 미국 최초의 한인 타운을 발굴했다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하와이 또는 샌프란시스코에 한인 타운이 최초로 형성됐을 것이라는 통설을 깨고 리버사이드에 미주 최초의 한인 타운이 형성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 자료로 증명했다는 큰 의미가 있다.

또한 한인들이 모여 사는 타 지역과는 달리 리버사이드 도산 공화국 또는 파차파 캠프는 가족 중심의 한인 타운이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또한 그것은 우연이 아닌 도산 안창호와 공립협회가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도 발굴했다.

또한 파차파 캠프는 단순히 미국 최초의 한인 타운이 아닌, 초기 미주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다는 것도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1905년 공립협회 창립의 중심 역할을 한 인물들 중 상당수가 파차파 캠프에 거주했으며, 1906년 신민회가 파차파 캠프에서 발기되었다. 또한 1907년 독립운동을 위해 한국으로 건너간 도산 안창호가 1911년 리버사이드에 다시 돌아온 후, 파차파 캠프에서 대한인국민회 북미 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이 회의에 최초로 북미 지방회장 전원이 참석했다는 놀라운 사실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도산 안창호와 부인 이혜련 여사 그리고 이혜련 여사의 외오촌숙인 김인수가 초기 파차파 캠프 형성에 큰 기여를 했으며, 김인수의 장남 김용련과 그의 가족들은 리버사이드에 계속 거주했다.

김용련의 막내 딸 바이올렛 김은 1922년 리버사이드에서 출생했는데 UCLA를 졸업하고 줄곧 리버사이드에 거주하면서 교사가 되었다가 1984년 은퇴했다. 올해 4월 23일 별세했다. 다행히 그녀가 소장하고 있던 사진과 자료들을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에 기증했는데 이 자료들을 분석할 예정이다.

1905년 도산 안창호는 백인 농장주인 코널리어스 럼지로부터 1500달러를 빌려 한인 노동국, 즉 직업 알선소를 설립했다. 한인 노동국 설립 후 취업의 문호가 열리자 많은 한인 노동자들이 파차파 캠프로 이주해 왔다.

럼지는 뉴욕에서 거주하다가 겨울이 되자 따뜻한 리버사이드에 방문하여 현재의 미션 인 호텔에 머물렀다가 1901년에는 리버사이드로 이주해 왔다. 1911년 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리버사이드에 거주하면서 한인, 멕시칸, 그리고 일본인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는 일본인들을 집 하인으로 고용했는데 1907년 일본인 하인들끼리 시기하여 총으로 상대방을 죽이고 자살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리버사이드는 동부의 부자들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려고 이주해 와 정착하여 만든 도시이다.

도산 안창호의 일대기에는 도산 안창호가 "하변"에서 잠시 일했던 것으로만 취급되었다. 도산 안창호의 미주에서의 활동은 주로 샌프란시스코 또는 로스앤젤레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이번 연구를 통해서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 또는 도산 공화국이 초기 미주 한인 사회의 중심이었다는 것이 새롭게 밝혀진 것이다.

도산 안창호의 일대기에 많은 부분 빠져 있어 새로운 사실들을 보충할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근현대사 그리고 독립운동사에도 수정 및 보완이 필요하다. 도산 안창호는 주로 점진주의자, 개량주의자, 또는 기독교인 등의 수식어로 표현되고 있다.

보수적인 성향의 기독교인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연구를 통해 도산 안창호는 진보와 보수를 통합하는 지도자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필요할 때는 무력항쟁도 지지했으며 사회주의자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함께 할 수 있다는 통합론자였다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이번 연구를 통해 리버사이드시는 옛 파차파 캠프 거주 지역을 리버사이드시 문화 관심지 1호로 지정했다. 도산 안창호의 막내 아들 랄프 안의 적극적인 지지와 한인 사회의 관심과 지지로 이루어낸 쾌거이다. 그러나 도산 안창호의 외손자 필립 안은 지금까지도 필자가 거짓말하고 있다고 공공연하게 반대하고 있다. 도산 안창호의 업적을 기리는 연구이며 사업인데 왜 반대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중앙일보에 지난 2017년 9월 25일부터 2018년 5월 21일까지 35주 동안 연재한 파차파 캠프 스토리는 이번 여름 책으로 출판될 예정이다. 책이 출판된 후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모여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공립신보와 신한민보에서 귀중한 자료들을 찾아 준 고려대학교의 주혜린과 윤지아 대학원생에게 고맙고 지난 35주 동안 필자의 글을 읽어주고, 격려해 주고, 관심을 보여준 독자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끝>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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