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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업] 현충일, 전쟁의 상흔

평화로운 날이다. 5월의 마지막 월요일, 메모리얼데이. 전사한 장병들의 무덤에 꽃을 꽃아주는 풍습에서 시작되었다는 미국의 현충일이다. 이 풍습이 정확히 언제 시작되었는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다르다. 대충 미국 남북전쟁(1861~1865) 이후, 전사한 젊은이들을 기리는 뜻에서 남쪽과 북쪽에서, 자발적으로 시작했던, 같은 마음의 행사였던 것 같다.

남북 전쟁 이후, 미국 국내에는 전쟁이 없었다. 하지만 2차대전, 한국전, 월남전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전쟁에 가담함으로써 많은 전사자를 내었다. 그래서 미국이 메모리얼데이를 지키는 것에는 많은 의미가 있다. 뜻은 그러했지만 대부분의 현대 미국민들은 국군 묘지를 방문한다거나 전사한 장병의 묘지에 꽃을 꽂는 것에, 또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에 관심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메모리얼데이는 주말을 끼고 하루를 더 놀 수 있는, 공짜로 얻는 연휴라 좋을 뿐이다.

웨스트우드에 있는 국군 묘지를 지날 때마다, 질서 정연하게 서있는 흰 대리석의 묘비를 본다. '저 많은 젊은이들은 누구를 위해서 죽었는가?' 라는 생각이 든다. 나라를 위해서? 또는 지구 다른 편에서 자유를 빼앗기고 있다는 다른 어느 나라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은 자신이 왜 징병되어 가는지를 알았을까? 그들은 열심히 가르쳐 준대로 싸웠고, 나를 위협하는 나와 같은 또 하나의 인간을 죽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던 젊은이들이었다. 자꾸 이 죽음들이 무의미하게 생각되는 것은 나의 나이 탓인지도 모른다.

나는 대학을 갈 때까지 명절에 만두를 먹어보지 못했다. 집안의 장남, 제일 큰 오빠는 20대에 한국전에서 전사했다. 그는 두 딸과 아내를 남겼다. 나는 오빠를 기억하지 못하고, 그의 두 딸도 사진으로만 아빠를 알고 있을 뿐이다.



휴전선이 그어지고 휴전이 선포된 후 우리 식구들은 부산 피난처에서 서울 후암동 집으로 돌아 왔다. 이 때터라고 기억되는데, 엄마는 필요한 말만 했다. 말이 없었다. 엄마가 우는 것을 본 적도 없다. 엄마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어두운 그늘은 슬픔이었을까. 아픔이었을까. 많고 많은 세월도 이를 이겨주지 못했다. 엄마는 참으로 오랫동안 만두를 빚지 않았다.

전쟁의 상흔은 깊고, 크고, 오래 간다. 재활이 불가능하다. 오히려 망각은 가능할 수 있다. 누구를 위한 죽음이었나에 포커스를 맞추게 되면 잃어버린 삶에 대한 절망이 우리를 음습할 것이다.

전쟁이 없던 시대가 없었다. 2015년에도 30개 국가에서 무기를 쓰는 전쟁 혹은 충돌이 있었다고 했다. 시리아가 좋은 예이다. 내가 잘 못 세었을 수도 있지만, 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전쟁이 중국의 삼국전쟁부터 현대까지 222번나 있었다. 이 중 100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전쟁은 2차 세계대전을 포함해 다섯 개나 된다. 100만에서 1000만 미만의 전쟁은 한국전을 비롯해 10개이다. 1000만까지 밖에 셀 줄 모르는 나는 전사자 숫자를 세다가 포기했다.

세뇌되는 집단은 이성을 잃고, 집단은 평화를 이룬다는 멋있는 슬로건을 내걸고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눈다. 무기는 가슴을 뚫고, 보이지 않는 독가스는 숨을 거두어 간다. 누구를 위한 죽임이고 죽음이던가. 평화가 세상 전체를 채울 수 있다는 것은 허무한 꿈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오늘, 메모리얼데이에.


모니카 류 / 암 방사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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