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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 추억의 버마, 비극의 미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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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중앙일보] 발행 2008/05/08 미주판 20면 기사입력 2008/05/07 17:15

이종호 편집위원

미얀마는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버마족과 카렌족 샨족 등 기타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동남아 국가다. 땅 크기는 남북한 합친 것의 3배가 넘고 인구는 4700만명에 90%가 불교를 믿는다.

버마라는 이름이 미얀마로 바뀐 것은 1989년이었다. 식민 잔재를 청산하고 모든 종족이 함께 하는 나라를 만들겠다며 집권 신군부가 그렇게 바꾼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버마를 고집하는 사람도 많다. 무엇보다 미국의 버마인들이 그렇다. 국민의 동의 없이 오로지 정권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름을 바꿨다는 이유에서다. 미국 영국 정부도 같은 이유로 버마를 고집한다. 한국은 1991년 이후 미얀마로 표기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버마라는 이름이 익숙하게 남아있다. 60년대에 이미 우탄트라는 걸출한 유엔 사무총장(재임 1962~71)을 배출해 부러움을 샀던 버마였다.

70년대엔 한국과 자웅을 겨루던 아시아 축구강국이기도 했다. 40대 이후 세대라면 메르데카 박스컵 킹스컵에서 단골로 부딪치며 우리를 괴롭혔던 버마를 기억할 것이다. 몽 에몽 몽 윈몽 같은 몽자 돌림의 스타들과 함께 말이다.

1983년 아웅산 폭발 사건으로도 우리와 아픈 인연을 맺었다. 전두환 대통령 암살을 목적으로 북한이 버마에서 폭탄 테러를 일으킨 것이다. 그 때 한국은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장관 등 17명의 아까운 인재들을 잃었고 버마는 바로 북한과 국교를 끊었다.

버마가 세계 뉴스의 초점이 된 것은 1988년이었다. 버마 군부는 국민들의 민주화 시위를 무차별 진압하면서 4000명에 이르는 사망자를 냈다. 국제 사회는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떠오른 아웅산 수치 여사에게 1991년 노벨평화상까지 주어가며 성원했지만 상황을 돌리지는 못했다. 박물관에나 들어갔어야 할 낡은 유물인 미얀마의 군부 독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국민들은 가난의 터널을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미얀마의 역사를 보면 소수 민족들의 이동과 부침이 심해 어느 한 왕조가 뚜렷이 지속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우리처럼 여러 왕조의 전통이 있었고 영국의 지배아래 오랜 식민통치도 겪었다. 물론 군부 독재도 똑같이 경험했다.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런 미얀마가 다시 뉴스의 중심에 섰다. 외신 보도를 보면 미얀마를 강타한 초대형 사이클론으로 죽거나 실종된 사람이 6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600 명이 아니고 6000 명도 아니고 무려 6만 명이다. 이쯤되면 2004년 인도양의 쓰나미 참사에 버금간다.

지난 해 승려들의 반군부 시위로 미얀마가 다시 세계의 이목을 끌었을 때 한국의 시민단체들은 성금을 모으고 유혈 진압에 대한 항의 집회도 열었었다. 한때 우리가 뼈저리게 겪었던 군사독재 민주화의 경험과 희망을 미얀마 사람들에게 전해 주려 했던 것이다.

이제 다시 그 마음을 나눌 때가 왔다. 엄청난 자연재해 앞에 망연자실해 있을 그들이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먼저 지원에 나섰다. 미얀마 군사 정권과 거리를 둬 왔던 미국도 이번에는 외면하지 않았다. 멀리 한국의 종교 시민단체들도 동참하고 있다고 한다.

불황이다 고유가다 해서 우리의 삶도 많이 팍팍해 졌다. 하지만 어려울 때 나누는 삶일수록 더 아름답다 했다. 절망의 땅 미얀마에 한인 동포들의 온정도 함께 전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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