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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20/20] 제2의 임꺽정

김완신 편집국 부국장

80년대초 대학시절에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을 어렵게 구할 수 있었다. '임꺽정'은 1928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일보와 조광 등에 발표된 역사소설이다. 조선 민중들의 삶을 큰 획으로 그리면서 당대의 풍속과 언어 묘사가 탁월해 한국근대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 전에 한번 출간됐을 뿐 그후로 남한에서는 출판은 물론 연구조차 금지가 됐다. 홍명희가 해방후 반미특위가 강제로 해산되고 친일파가 득세하면서 남한정부에 실망 자진 월북해 부수상까지 지낸 인물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내용이나 문학적인 가치는 상관없이 작가가 월북했다는 이유만으로 '임꺽정'은 불온서적이 됐다. 당시 구했던 '임꺽정'은 책이 아니라 신문 연재소설로 발표된 것을 조각조각 모아 복사본으로 엮은 것이었다. 인쇄가 조악한 40~50년전 신문을 복사한 후 이를 여러번 다시 복사해 군데군데 보이지 않는 부분이 많아 읽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그렇게나마 읽을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던 시절이었다.

복사본을 힘들게 구해 가방에 넣고 하교하던 길에 전투경찰로부터 수색을 당했다. 제5공화국 시절 학교 입구에 배치된 전경들은 의심스러워 보이는 학생들을 가방을 임의로 뒤졌다. 운이 좋게도 가방을 수색했던 전경은 임꺽정을 무협지 정도로 생각했는지 재미있냐고 물은 뒤 돌려주었다. 서구사회주의 이념서적도 금서가 됐던 시절에 북한 부수상의 저서를 읽는 것은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을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홍명희 외에도 1988년 납.월북 문학가들이 해금되기 전까지 작품을 읽을 수도 연구도 할 수 없는 작가들이 많다.

서구 시이론 도입의 선구자였던 김기림 30년대 모더니즘 작가 박태원 조선 시정신을 일깨운 백석 평론가 임화 등도 한국문학사에서 철저하게 제외됐었다. '향수'의 시인 정지용도 해금조치 이후에서야 그의 시편들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졌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가 북으로 가지 않았다면 민족시인이라는 칭호는 김소월이 아닌 그에게 주어졌을지도 모른다.

맹목적인 반공주의는 결국 한국문학의 지평을 좁혀 반쪽의 문학사를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빨갱이 책'으로 취급됐던 그들의 작품이 번듯한 책으로 출판돼 사랑을 받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는 민족문제연구소가 1905년 을사조약이후 1945년 해방까지 일본에 적극 협력한 4776명의 친일 인명록을 공개했다.

이중에는 한국근대무용의 선구자인 최승희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고향의 봄'의 작사가 이원수 등이 포함돼 있다. 또한 가곡 '선구자'로 유명한 조두남도 친일 인명록에 포함됐다. 최승희는 일본에 군용비를 냈고 안익태는 일왕을 찬양하는 노래를 작곡했다는 이유에서다. 반일문학으로 옥고까지 치렀던 이원수는 친일글 5편으로 명단에 올랐다.

친일 단죄의 정당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친일 명단에 오른 문화.예술가들의 작품들까지 친일의 형틀에 매달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고향의 봄'을 부르며 떠올리는 어린 시절과 애국가를 합창하며 품었던 나라사랑이 친일로 매도될 수는 없다.

임꺽정은 80년대 후반에 결국 책으로 나왔고 그 책을 읽고 사회주의를 찬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고향의 봄' 어느 구절에도 친일의 흔적은 없다. 이념은 반세기를 못 넘기지만 작품은 시대를 초월한다. 친일 행적은 밝혀져야 하지만 그 오래된 굴레가 '제2의 임꺽정'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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