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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따가운 뽀뽀

어렴풋이 생각나는 기억 속에 지우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일곱 살쯤 되었을 나이였다. 가냘프게 대문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 문을 여니 아버지가 서 계셨다. 반가운 마음에 양팔을 펼쳐 드니 아버지는 힘없이 내 작은 품 안으로 몸을 기대셨다. 어쩔 줄을 모르고 낑낑대며 비틀거리는 아버지를 겨우 대청마루까지 모셨다. 언제나 산처럼 크고 강인하시던 분이 맥없이 내 앞에 누우셨다.

그때부터 난 웃음을 잃은 것 같다.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과 나 그리고 여동생에게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버거운 존재였다. 병세가 악화되어 더 이상 교편에 서 계실 수가 없게 되자 어머니는 이민을 생각하셨다. 본격적인 이민이 시작되던 1970년도 중반이었다.

인터뷰를 하던 날이 떠오른다. 미국에 아무 연고도 없고 또한 재정보증을 서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하니 줄에 선 많은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대사관에서 이민 허락이 나올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날 아버지는 평소와는 달리 또렷한 말투로 인터뷰를 하는 직원과 대화를 하셨다. 미국에 가면 유학 시절 담당교수와 연락을 취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잡지에서 뜯어낸 한 장의 기사를 품 안에서 내밀었다. 기사는 일종의 논문이었는데, 바로 아버지 당신의 이름과 담당 교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직원은 활짝 웃으며 일본에서 권위 있는 약학 계통의 잡지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는 대사관 직인을 서류 위에 꾹 누르고는 서명을 했다.

이민 온 후에도 아버지의 간헐적인 발작은 지속되었다. 친할아버지 장례식 때 충분히 익히지 않은 돼지고기가 원인이었다고 한다. 갈고리촌충이 마디마다 알을 낳고 그 미세한 알이 혈관을 따라 돌다 아버지의 뇌에 박혀 굳어진 것이다. 한국서 가져온 주사약이 모두 열 개였다. 심하게 아프실 때마다 주입시켰는데, 마지막 병을 주입하고 나니 당황스럽고 암담했다. 병원을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고, 병원비 걱정에 아버지를 치료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크게 아프지 않을 때는 언제나 같은 질문을 수십 번 반복해 물으셨다. 당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어쩌다 이러고 있는지, 원망스런 음성으로 우리들을 괴롭히셨다. 강의를 하러 학교에 가야 한다며 민소매 위로 넥타이를 매시기도 했다. 자꾸 밖으로 나가신다고 해서 문에 달린 손잡이를 아예 없애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집을 나가서 3일 만에 찾아 온 적도 있었다. 반복되는 하루하루의 삶이 참으로 가혹했다. 어쩌다 저리 되셨을까?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제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최연소의 나이로 J 약대 유기제약 교수가 되신 분. 일어, 영어, 중국어, 이탈리아어, 에스페란토까지 하시던 재원이 종일 멍하니 누워만 계셨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병치레를 하시다가 끝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말은 이제 더 이상 고생 안 하셔서 차라리 잘됐다 했지만 가슴 한 쪽이 무너지고, 아프고 쓰라렸다. 새삼 아버지가 건강하셨을 때 우리에게 주신 사랑들이 떠올랐다. 술 한 잔 걸치시면 나를 목마 태우고 팝송을 흥얼대시던 아버지. 내게 꽃밭도 만들어 주셨던 아버지. 유난히 여동생을 사랑하셨는데, 여동생은 그 힘으로 외래와 연구를 병행하는 지독한 여정을 이겨냈다. 그래서 전례 없는 연구비 지원도 받아내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간질병 치료에 앞장서는 과학자가 되었다.

난 아버지의 뛰어난 어떤 면모도 물려받지 못했다. 하지만 감히 아버지의 따스한 마음을 닮았다고 믿는다. 그래서 내가 쓰는 글이 아버지의 다정하신 마음을 닮았으면 좋겠다. 아버지가 그립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담배냄새 난다고 밀쳐도 크게 웃으시며 나를 꼭 안고 거친 턱수염으로 뺨에 따가운 뽀뽀를 날리시던 아버지의 사랑이 사무치게 그립다.


고성순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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