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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만 되면 무전기 메고 적군 동태 파악했다"

6·25 참전 화교 외인부대 생존자 인터뷰

대만 출신 200여명으로 구성
유창한 중국어로 적 후방 투입
"한국 위해 싸워야 한다" 생각
정부에 작은 위령비 설치 호소


6·25 한국전쟁 당시 국군부대 소속 외인부대가 있었다. 중화민국 즉 현재의 대만 출신으로 구성된 화교부대다. 그들은 'SC(Seoul Chinese)지대'라 불리며 북한 공작원을 훈련시키던 육군 4863부대(HID) 소속으로 제1사단 등에 배치됐다. 유창한 중국어 실력으로 적 후방에 투입돼 적의 부대 위치 파악과 요인 납치 포로 설득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참전한 화교는 200명가량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 가운데 생존자는 20여명. 이제 대부분 숨지고 미국으로 이민한 3~4명 중 현재 이수해(86) 선생만 연락이 닿고 있다. 22일 몬테레이시티에 위치한 그의 자택에서 참전 전사자의 동생 언진기(83) 선생과 함께 만났다.

"밤만 되면 (첩보 활동을 위해) 도둑고양이처럼 돌아다녀. 중공군 옷을 입고 있으니 미군에 발각되면 포탄을 맞고 중공군에게 수상하게 보이면 포위돼 사살 당했지."

서울시 종로 5가 가마솥 공장에서 일하던 17세 소년 이수해는 1사단 부대마크가 달린 군복을 입고 나타난 친구를 따라 전방 부대에 입대했다. 한국전쟁의 포화로 이미 두 형을 잃은 그는 어머니에게 한마디 말도 남기지 않고 무작정 군에 들어갔다. 그는 군복도 없이 입던 옷을 입고 산에서 꺾은 나뭇가지로 군사훈련을 받았다. 전쟁 발발 이듬해 강원도 동부전선에 투입돼 적군에 포위당한 뒤 탈출해 강화도에서 첩보 교육을 받고 중부전선으로 투입됐다.



"해가 뜨면 부서진 다리 아래 숨어있었지. 그러다 밤만 되면 무전기를 메고 나와 적군의 동태와 위치를 파악하고. 그래도 신호탄이 하늘에 터지면 바닥에 떨어진 바늘이 보일 정도로 환했거든. 그때면 아군인 미군이 적으로 생각하고 포탄을 쏴댔지"

친구는 아군이 쏜 포탄에 맞아 다리를 다쳤다. 그도 작전 수행 중 날아온 수류탄 파편에 오른쪽 뺨에 깊은 상처가 생겼다.

같은 화교 출신인 언진기(83)씨의 친형은 이수해 선생과 투입된 동부전선에서 적군에게 포위돼 사살 당했다. 시신도 찾지 못했다. 그도 군에 입대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리다며 퇴소됐다.

"요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당시 화교들은 한국을 한 가족이라고 생각했어. 정말 나라를 위해 같이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지."

미국으로 이민 온 뒤에는 중국 사람들과 갈등을 겪었다.

이수해 선생은 "중국 전기기술자가 집에 와서 내가 받은 표창장을 본거야. 그러더니 자기 아버지와 싸운 사람이라고 매서운 눈으로 쳐다봤지."

한국전쟁 발발 68주년. 그들은 돈 한 푼 받지 않고 한국전에 참전했지만 군번도 없고 국가도 달라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 선생과 언 선생은 "보상도 필요 없다. 우리가 죽기 전에 한국 보훈시설에 작은 화교 의용군 위령비만 설치해 달라"고 호소했다.

당시 참전한 10대 20대 화교들은 대부분 식당 주방장 종업원들이었다고 한다. 휴전 후 서울 대구 부산 등지로 흩어져 다시 식당일을 했다고 전한다.

이수해 선생은 당시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

"생생히 기억나요. 다들 돌아가며 외쳤죠." "나는 주방에서 일하지만 이렇게 같이 모여서 좋다" "죽어도 좋다" "우리 대장을 위해 한국을 위해 나가자"


황상호 기자 hwang.sangho@koreadaily.com hwang.sangho@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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