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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속 뉴스] '글씨'를 못 쓰겠다

김석하 / 논설위원
김석하 / 논설위원 

[LA중앙일보] 발행 2018/07/03 미주판 20면 기사입력 2018/07/02 18:27

글은 쓰겠는데 '글씨'를 못 쓰겠다.

올해 들어 지난 6개월간 손으로 '글씨'를 써 본 적이 있던가? 없다. 작년에는? 없는 거 같다. 언제 썼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간혹 한두 문장 쓰고, '이거 뭐야, 내 글씨가 아닌데' 화가 나기도 한다.

문자 메시지 시대다. 아침에 눈을 떠 잠들기까지 휴대폰으로 수십 수백 개의 메시지를 보내고 받는다. 말로 의사를 전달하는 일은 하루에 한두 건 있을까 말까다.

문자 메시지는 개인화되고 자기 중심적 현대사회에 적합한 소통 양식이 됐다. 문자는 목소리 전화를 받을 상대방에게 불편을 끼칠 것 같을 때 부담을 덜어 준다. 반대로 목소리로 나의 뜻을 전달하면 내 속마음이 불편할 거 같을 때도 마찬가지다.

문자는 너와 나 사이, '제 3의 공간'이다. 문자는 답이 늦어져도 상관없다. 사안이 급하지 않거나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는 무시해도 좋다. 서로 간의 모든 불편·부담을 제 3의 공간에 내다 버리고, 실낱같은 관계 끝에 따로 서서 정체성과 자존심을 지키면 된다.

문자 공간에서 모든 관계의 중심은 나다. 타자(他者)에 대한 통제와 조절이 가능하다. 통제권과 조절권이 주어지는 순간 '다중 인격'도 가능하다. 메시지 창을 여러 개 켜놓고 서너 명이랑 '동시에 다른' 대화를 할 수 있다. A와는 정보를 교류하고, B랑은 시시콜콜한 잡담, C와는 '뒷담화'(한 사람을 놓고 다른 창에서 동시에 칭찬하거나 욕하거나). 그리고 회사 동료 D와는 업무 이야기를 한다. 목소리 전화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문자 메시지는 좋은 뜻으로 멀티 태스킹, 나쁜 뜻으로는 다중 인격적 분열증을 내포하고 있다.

18세기 사람 장 자크 루소는 "글은 말의 위험한 보충"이라고 했다. 말이 글보다 먼저라는 이 이야기는 300년 만에 앞뒤를 완전히 뒤바꿨다. 한발 더 나가, 말은 글이 아닌 "문자의 위험한 보충"이 됐다.

고개를 수그려야만 보이는 종이 위에 생각(글)을 글씨로 써왔던 사람에게, 눈(시선)과 같은 위치에 있는 하얀 공간(모니터)에 글을 담아야 하는 시대는 더 이상 글씨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펜글씨로 종이를 조각하듯 치밀하게 글씨를 배운 사람, 악보 같은 4개의 실선 사이로 영어 글씨를 그리며 배웠던 사람에게 글씨의 독자성·독창성은 유물이 됐다. 이제 글씨는 검은 선과 그 사이 흰 색의 디지털 양식(0과 1)을 따를 뿐이다.

신언서판(身言書判). 글씨는 또 다른 나였다. 이제 그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는 없다.

작가 김훈은 "나는 연필을 손에 움켜쥐고 '온 팔 힘으로' 꾹꾹 눌러 쓴다"고 멋진 허세를 부렸지만, 사실 그도 자판기를 두드렸다. 그런데 '새끼손가락을 부자연스럽게 내뻗어야 하는' 굴욕감이 들며 "이게 선비가 할 짓인가"라는 생각에 연필로 돌아섰다.

요즘 글씨를 왜 못 쓰는 걸까. '쓸 일이 없어서, 안 써서'라는 모범 답이 있긴 하다. 하지만 수십 년을 버릇 들여오고, 인체 공학적으로도 매우 복잡한 일을 몇 년 만에 훅 날려버릴 수 있는가.

디지털 속도감 때문이다. 내리찧는 타력의 속도와 움켜쥐고 선을 그리는 속도는 매우 큰 차이다. 그런데 두 속도감을 머릿속에서는 단순히 글씨를 쓰는 중이라고만 인식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압도적인 디지털 속도가 손글씨를 옭아매고 있다. 독창성 있고 진심을 담은 그 무엇도, 느린 속도는 빠른 시대에 죄악이다. 부지불식간에 생긴 이러한 디지털 조급증이 글씨를 해체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 시대, 너와 나의 '글씨'는 사라졌다. 너와 나의 '오리지널리티'도 사라졌다. 지우면(delete) 끝인 시대, 쓰다 버린 파지(破紙)에는 너, 그리고 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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