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너의 ‘마지막 잎 새’는 아직도 달려 있다

[늘샘 반병섭의 세월은 추억의 창고]

한국에 저명한 P씨가 있다.
나이가 노경(老境)에 들면서 글을 쓰지 않는다.
“전에 썼던 것 보다 못 한 글을 쓸 수는 없다” 그것이 이유이다.
그 분이 쓴 글은 모두가 주옥(珠玉)같은 수필이다.
그러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나는 요새 전 보다 더 쓰고 있다.
“전에 썼던 것이 시원치 않으니...” 그러면 지금 쓰는 것은 “오늘 쓰는 것이 어제 것 보다 낫고, 전에 상재 했던 책 보다 근자의 것이 나아 보이니 쓰는 자미가 있고 펴내는 보람이 있다.
착각(錯覺)이 아니기를 바라지 마는.

절필(絶筆, The person's last writing)은 뛰어난 글을 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글 이후에 쓴 글이 없는 것을 말 한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絶筆한다고 생각하며 쓰고 또 쓴다.
글을 쓸 때도, 설교를 할 때도, 여행을 할 때도, 사람을 만나고 작별 할 때도 ‘마지막’ 이라고 느껴질 때가 많다.
젊었을 때 “마지막!” 그런 표현을 하면 미숙(未熟, 주제넘게)으로 들리지만 지금은 그 말이 성숙으로 들을 수 있다.


어쩌면 하루하루를 산다는 말이기도 하고 “날마다 죽는 다”(고전15:31)는 말이기도 하다.
죽는데 살고 있으니 매일매일 다시 산다는 말이기도 하다.
단절(斷絶)과 연속(連續)이다.
다시 아침 해를 대하는 것, 피어나는 크로코스를 이른 봄 다시 볼 수 있다는 기적을 감사 하며 산다.
비기적(非奇蹟)의 기적을 산다는 말이다.


소설도 과거에 쓴 일이 없으니 시작하는 것이고, 오래 살았으니 많은 경험도 나누고 싶다.
누구나 팔십을 넘겨보시라! 생각 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다를 것이다.
“늙으면 욕망을 버리라” 라고 한다.
그렇다.
그러나 나는 퇴장의 박수는 받고 싶은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맞는 것 없으니
모자(冠)는 주어도 쓰지 못한다.

받아도 간수 못하니
꽃다발도 사양 하면서

버리려고 했다가
다시 드려 놓고
주려고 했다가 마음 변하고
도모지 정리를 못하며 산다

휴지통의 종이 한 장도 다시보고
사진도 찍고 모아 둔다

(중략)

퇴장 하는 가수의
앵 콜 앵 콜
박수가 부럽다

혹자는 위로의 말로, 머리가 희어 지는 것은 멀리서도 알아보는 관록, 행동이 둔해 지는 것은 매사에 신중 하라는 지혜, 귀가 약해지는 것은 이순(耳順)의 덕, 시력의 고장은 안 볼 것 보지 말라는 교훈, 기억력이 둔 해지는 것은 잊을 것 망각 하는 은혜... 늙었다고 노인, 많이 늙었다고 원로라고도 한다.
사진이라도 찍을 때는 앞자리에, 음식을 먹을 때도 먼저 들라고 한다.
아직도 경로사상이 남아 있는 곳에 가는 때가 즐겁다.


그렇다.
서서 뛰고 다닐 때는 실수가 많았고, 앉아서 생각 하는 시간이 많으면 궁상스러워 보인다.
운동 하는 것도 뜨악해 지고, 여행도 번거롭다.
그저 집이 제일 편안 하고, 앉았다가 눕는 것이 낙이다.
그리고 가장 많은 시간을 컴퓨터에 매달려 있다.
어찌 보면 가련(?)해 보이는 단순 반복이다.
나는 이 단순 반복 속에서 날마다 새로워지고, 넓어지고, 깊어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소설을 쓴다.
산수(80세) 이후에 쓴 소설(단편)이 9편이 된다.
한 권의 책이 될 분량이 되어 간다.
나에게 있어서 소설은 노동이요, 구원이 된다.
노동을 즐거움으로 할 때는 운동이 되고 운동은 건강을 만든다고 한다.
그러기를 바라면서... 내가 매달려 있는 컴퓨터는 어쩌면 ‘오 헨리’의 ‘마지막 잎 새’ 일는지 모른다.
그 마지막 잎 새가 떨어지는 날...

나의 소설은 Fiction(虛構)이라고 하기 보다는 Fusion(融合)이다.
허구가 아니고 보완 하는 것이다.
이런 일에 몰두 하다 보면 일상(日常)속에서 비 일상을 살게 된다.
6.25가 머물다 가고, 젊음이 찾아오고, 유학시절의 고독도, 이민 개척기의 보람도, 목회로 보낸 세월이 희비의 쌍곡(雙曲)으로 추억의 창고에서 불쑥불쑥 휘파람 분다.


나의‘마지막 잎새’는 아직도 달려 있는가 폐렴으로 죽어 가는 존시가 창 너머로 볼 수 있는 마지막 잎새를 지켜보며 “저 잎이 다 떨어지는 날 나도 죽는다”라고 믿고 있다.
한 번도 걸작을 못 그렸던 가난하고 늙는 화가, 베어민은 담쟁이덩굴에서 떨어지지 않는 잎새를 벽에 그린다.
그리고 죽는다.
그 마지막 잎 새가 달려 있는 동안 존시는 죽지 않는다.
그리고 회복 된다.


그렇다 나의 ‘마지막 잎새’는 Laptop(노트 뿍)의 Key Board다.

*오. 헨리(O. Henry, 186-1910) ‘The Last Leaf’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아래 공란에서 쓸 수 있습니다.

▷중앙닷씨에이 www.joongang.ca
▷캐나다 밴쿠버 중앙일보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