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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석의 앵그리2030]⑩손자에게 부담 떠넘긴 국민연금…이대로 두실 건가요?

[한국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8/08/03 09:08

어린 시절 세뱃돈 기억하시죠? 받긴 했는데 곧 회수당합니다. ‘엄마가 돌려줄 거야!’ 철석같이 믿지만, 보통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세뱃돈과는 비교도 안 될 보살핌과 사랑을 받았으니까요. 세뱃돈처럼 국민이 정부에게 맡기는 돈이 있습니다. 국민연금입니다. 맥락은 비슷하죠. ‘네가 관리하긴 어려우니 나중에 돌려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매달 월급에서 조금씩 걷어간다는 점이죠.

국민연금


악착같이 떼갈 땐 좀 ‘거시기’한 데 국민연금은 장점이 많습니다. 일단 훌륭한 재테크 수단입니다. 국민연금은 물가상승률을 반영합니다. 물가가 올라도 그 실질가치를 보장하는 건 굉장한 매력입니다. 가입 당시 소득이 100만원이었더라도 현재가치로 200만원이라면 이를 기준으로 연금 지급액을 계산하죠. 시중에 판매하는 그 어떤 상품도 국민연금보다 실질 수익이 뛰어나지 않습니다. 가입 대상자가 아닌데 가입을 원하는 사람이 있는 이유죠.

국민연금은 소득재분배 기능도 합니다. 전체 가입자의 평균 소득이 본인의 소득보다 높은 저소득층은 자신이 낸 보험료보다 더 받고, 고소득층은 상대적으로 덜 받는 식입니다. 공익에도 기여하는 셈이죠.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참 좋은데 난제가 하나 있습니다. 현재의 장점을 천 년, 만 년 유지할 수 없다는 거죠. 소득이 있는 국민은 싫든 좋은 보험료를 내는데, 아직은 걷는 돈이 나가는 돈보다 많습니다. 1988년 도입 이후 차곡차곡 모은 기금이 635조원입니다. 2043년엔 무려 2561조원으로 늘어납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돈이 완전히 사라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17년. 2060년 마이너스로 전환할 거로 예상합니다. 받을 사람은 늘고, 낼 사람은 줄어드니까요. 한국 사회를 물귀신처럼 따라다니는 저출산·고령화의 그늘입니다.

나라마다 국민연금 운영 방식은 조금씩 다릅니다. 크게는 쌓아둔 돈으로 연금을 주는 적립식과 필요한 돈을 해마다 걷어서 연금을 지출하는 부과식으로 나뉩니다. 한국도 아직은 기금에 여유가 있지만 쌓인 돈이 고갈되는 2060년엔 어쩔 수 없이 부과식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보험료를 내는 건 같지만, 액수는 크게 달라집니다. 지금은 모아둔 돈이 있고, 그 돈을 굴려 얻는 수익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근로 세대가 내는 보험료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합니다. 예상대로라면 2060년부터 보험료율을 당장 21.4%로 올려야 합니다. 지금이 9%니 2배가 넘습니다. 우리는 9%를 내고 연금을 받으면서, 자식에겐 ‘월급의 5분의 1을 우리를 위해 내놓으라’고 말해야 하는 거죠. 그리고 한마디 더 해야 합니다. “너희가 받을 연금은 너희 자식들에게 알아서 걷어라.”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예전에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부과식’을 ‘세대 간 도적질’에 빗댔다가 질타를 받았습니다. 사실 틀린 얘기는 아닙니다. 국민연금엔 ‘소득재분배 기능’뿐만 아니라 ‘세대 간 소득재분배’ 기능도 있습니다. 도입 당시 초기 가입자(현재 60~80대)를 배려하는 목적이었죠. 이 세대의 상당수가 자신의 노후는 물론 부모를 봉양해야 하는 이중 부담을 지고 있던 점을 고려했습니다. 그래서 낮은 보험료에서 출발해, 차츰 올리는 식으로 설계했죠. 실제로 1988년 도입 당시 3%였던 보험료율은 1993년 6%, 1998년 9%로 차츰 올랐습니다.

그러나 이후 20년째 9%에 머물러 있습니다. 선진국의 보험료율은 보통 15% 이상입니다. 한국도 보험료율을 올려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됐죠. 노무현 정부가 인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이후에도 몇몇 정치인이 용감한(?) 도전에 나섰지만 수포가 됐죠. 표 떨어질 걸 각오하고 ‘꼭 필요한 일이다’ 설득하는 건 사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제때 인상을 못 하고 20년이 흘렀다는 건, 이 기간에 국민연금을 납부한 세대가 상대적으로 혜택을 봤다는 뜻입니다.

물론 소득대체율(연금지급액이 생애 평균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중요합니다. 생계를 걱정하는 빈곤 노인이 40%에 달하는데 국가든, 후세대든 나 몰라라 해서는 안 됩니다. 게다가 현재 국민연금의 실질 소득대체율은 20~30% 수준입니다. 생활비는커녕 용돈 수준이죠. 당연히 올려야 합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러나 모든 일엔 순서가 있습니다. 2007년 국민연금 개혁 작업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소득대체율 50%’가 적정하다고 봤습니다. 그때 전문가 사이에서 지지를 받았던 의견이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보험료율 12.9%’였죠. ‘더 내고 더 받자’는 게 공통된 의견이었다는 겁니다.

만약 내년에 소득대체율을 50%로 인상하고, 보험료율은 5년 뒤에 인상하기로 했다고 치죠. 현재 55세인 A는 10년 뒤 소득대체율 인상 혜택은 보겠지만, 퇴직(60세)할 때까지 보험료 부담은 그대로입니다. 앞서 살폈듯 지금의 40~50대는 보험료율이 고정된 20년 동안 이미 혜택을 봤습니다. 특정 세대는 이득을 보고, 후세대가 부담을 지는데 이걸 정말 ‘세대 간 소득재분배’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실 이 ‘세대 간 소득재분배’ 논리엔 후세대로 갈수록 더 잘 살 것, 보험료를 더 많이 낼 것이란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한창 경제가 성장하던 때였으니 합당한 논리였죠. 그러나 이제 한국 경제의 고성장기는 끝났습니다. 경제성장률은 신흥국은커녕 미국에도 뒤처질 판입니다. 주력 산업은 풍전등화, 취업난은 점입가경이죠. 자칫 장기 침체란 최악의 시나리오를 마주할 수 있다는 우려가 더 큽니다.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 주식운용 부서 직원이 업무를 하고 있다.(저작권자 ⓒ 1980-2018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일각에서는 ‘국민연금은 애초에 쌓아둘 목적이 아니라 노후 보장용’이라고 지적합니다. 모으다 보니 쌓인 것이고, 다 쓰면 부과식으로 전환하면 된다는 주장이죠. 그러나 이는 후세대가 떠안을 보험료 부담을 간과한 주장입니다. 또한 현재 600조원이 넘는 국민연금 기금은 대부분 국내 주식·채권·부동산에 투자되고 있습니다. 앞으론 2000조원을 넘어서죠. 국내 상장 기업 전체를 사고도 남는 돈입니다. 이 돈이 단기간에 빠지면 시장이 받을 충격은 어느 정도일까요? 고갈을 피할 순 없더라도 최선의 선택이 ‘그 시점을 최대한 뒤로 늦추는 것’이란 점은 부인할 여지가 없습니다.

꼭 곳간을 다 털어먹고 나서 부과식으로 전환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여유가 있을 때 500조원이든 1000조원이든 미리 떼서 별도 기금으로 만들고, 거기서 나온 수익을 활용하는 것도 아이디어입니다. 물론 이 돈을 굴리는 기금운용본부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는 다른 차원의 문제지만요. 어쨌든 한국도 나중의 국민연금을 어떻게 할 건지 하루빨리 논의를 시작해야 합니다. 앞서 공적연금을 도입한 선진국은 대부분 기금 고갈 시점에 연금을 둘러싼 세대 갈등을 피하지 못했거든요.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보건복지부가 이달 중 4차 국민연금 재정 추계 결과와 연금제도 개선 방안을 공개할 예정입니다. 발표 전이지만 기금 고갈 시기가 기존 예상보다 3~4년 빨라질 것이란 전망이 나오네요. 복지부는 결과 발표와 함께 대국민 공청회를 열고, 소득대체율과 보험료율 인상에 대해 논의하겠다는 입장입니다.

이번만큼은 보험료를 정상화하자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길 바랍니다. 나중에 내가 받을 연금의 안정성을 주장하려면, 그 연금을 지탱할 손자·손녀에 대한 배려도 필요합니다. 그 고민, 바로 지금 시작해야 합니다.

세종=장원석 기자 jang.wo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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