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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 책 팔러 중고서점에 가다

[LA중앙일보] 발행 2018/08/24 미주판 20면 기사입력 2018/08/23 18:49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라는 말이 있다. 대장부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 분량의 책은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10대 때 처음 이 구절을 만나고 몹시 가슴이 뛰었었다. 다섯 수레라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단 말인가.

그 많은 책을 남자만 읽어야 한다는 게 요즘은 꽤나 우습지만 어쨌든 이 구절 덕분에 더 열심히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읽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다섯 수레 분량을 증명이라도 해야 하는 것처럼 수중에 들어온 책은 거의 버리지 않고 모으기까지 했다.

50이 넘으면서부터 다섯 수레 집착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졌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은 옛날 다섯 수레 책은 그다지 많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됐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 책(冊)은 글자 모양 그대로 대나무 죽간에 글을 쓰고 그것을 엮어 만들었다. 부피가 크고 두꺼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다섯 수레라 해도 요즘 웬만한 책 몇 권보다 오히려 내용은 더 적었을 수 있다. 다독(多讀)보다 정독(精讀) 쪽에 더 무게를 두게 됐다는 말이다.

두 번째는 달라진 시대 분위기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은 필경 길이 별로 없던 시절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21세기는 길이 너무 많은 시대다. 스마트폰 속에도, 유튜브 속에도 길은 있다. 백과사전식 정보는 검색만 하면 언제 어디서든 바로 찾아볼 수 있다. 부실한 내 기억을 대신해 줄 똑똑한 기기들도 너무 많다. 비싸고 공간만 차지하는 종이책을 애써 고집하거나 애타게 끼고 있을 이유가 점점 없어지고 있다.

세 번째는 철석같이 믿어 왔던 책의 효용에 대한 회의다. 책 속에 지식과 지혜가 있다는 믿음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 그랬다면 책 많이 읽은 순서대로 똑똑한 사람,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현실은 별로 그렇지 못했다. 나만 해도 어리석은 판단과 행동을 여전히 되풀이하고 있다.

이런 이유들로 나중에 꼭 다시 읽겠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 책부터 하나 둘 줄여왔다. 최근 이사를 하면서도 또 한 번 서가를 정리했다. 요즘은 책을 준다 해도 반기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래도 그냥 버리기는 아까워 헌책방에 내다 팔기로 했다. 200여 권을 추려 한인타운 중고서점에 가져 갔다. 헌책방에도 나름대로의 구매 원칙이 있었다.

일단 고유 식별번호인 국제표준도서번호(ISBN)나 바코드가 없는 책은 안 산다. 1990년대 이전 나온 책은 대부분 이게 없다. 밑줄이나 낙서가 다섯 개 넘어도 안 산다. 너무 흔한 책은 '재고초과'라는 이유로 역시 안 산다. 서점 자체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책도 제외된다. 주로 자비 출판한 책들이 이에 해당된다. 사도 되팔릴 만한 책만 산다는 얘기다. 결국 가져 간 책의 4분의 1은 도로 들고 나와야 했다.

간택된(?) 책의 구입가는 대개 권당 1달러였다. 신간은 2달러, 드물게 실용서적이나 최신 베스트셀러는 3~4달러까지 쳐 주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150달러 정도를 받았다. 바로 나오려 했지만 책구경 버릇이 도져 서점 서가를 또 둘러보았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호모데우스', 유명 건축가인 유현준 교수의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가 눈에 들어왔다. 50달러를 지불했다. 방금 내가 판 책 50권 값이다. 그래도 아깝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읽고 싶은 책을 대면했을 때의 기대와 설렘은 뿌리치기 힘든 마약 같다. 상상도 못했던 발랄한 생각, 전혀 몰랐던 새로운 세계, 그리고 기막히게 매력적인 문장들. 책 읽기를 통해 이런 것들을 발견하고 씹어 음미하는 과정은 어떤 유흥으로도 대체하지 못할 즐거움이다. 그리고 아주 가끔이지만 내가 읽은 한 권의 책으로 생각과 행동이 바뀌기도 하니 어찌 몇 십 불 책값이 아까울 것인가.

결론이 어뚱해졌다. 책 속에만 길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하려 했는데 쓰다 보니 결국 '책 자랑'이 되고 '그래도 책을 읽자'가 되었다. 별 수 없이 나도 이렇게 '꼰대'가 되어가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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