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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맛과 멋] 나의 빨강머리 앤

내게 첫 잡지는 중학교 때 발행되고 있던 '학원'이다. 중학생 때 애독한 학원의 기억은 매우 또렷하다. 연재되고 있던 조흔파 선생의 명랑소설 '얄개전' 때문에 다음 달 잡지가 나올 때까지 안타깝게 기다렸던 까닭이다.

주인공인 대학교수의 아들이자 여드름 대장, 개구쟁이, 낙제생 얄개 나두수가 선생과 친구들을 골탕 먹이는 얘기, 그러면서도 용감한 전사처럼 일이 터지면 해결사가 되는 의외의 반전들이 참으로 재밌었다. 더 재미난 건 여자 동급생 남궁동자다. 키가 크고, 유난히 못생긴 키다리 남궁동자는 힘이 장사인 만능 스포츠 실력파다. 그 못난 동자가 잘 생긴 남학생을 짝사랑하며 가슴 졸이는 일이나 어려운 친구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의리!들이 어찌나 감동적이고 쫄깃쫄깃한지 전깃불 늦게까지 켜면 빨리 자라는 엄마의 호통에 이불 속에서 촛불 켜고 읽다가 머리카락 태운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 진짜 큰 영향을 준 것은 잡지보다 신지식 선생이 번역하고 계시던 '빨강머리 앤'이다. 학교신문 '숙란'을 만드는 신문반이었으므로 각 고교에서 오는 고교신문들을 받아볼 수 있었는데, 이화여고 교지인 '거울'에 신지식 선생이 '빨강머리 앤'을 번역해서 싣기 시작한 것이다. 그 책이 다섯 권으로 발행된 건 먼 훗날의 일이다.

'빨강머리 앤'은 내게는 성경과도 같은 책이 되었다. 고아지만 늘 긍정적으로 매사를 받아들이는 앤은 머리카락이 빨개서 친구들에게 조롱 받지만 자기만의 스타일로 자신을 꾸밀 줄 알았다. 결혼해서도 펑퍼짐한 아줌마가 아니라 슬기와 아름다움으로 자신의 커리어를 쌓는 앞선 여성이었다. 똑똑하고 능력 있으며 따뜻하게 남을 배려하고, 무엇이든 함께 나누고, 끊임없이 더 나은 무엇이 되고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이런 앤의 긍정의 힘과 선구자적 모습은 처음 미국에 이민 왔을 때의 혼돈과 고뇌의 시간에도 청량제가 되어주었다. 힘들 때마다, 울고 싶을 때마다, 하도 읽어서 너덜너덜해진 다섯 권의 '빨강머리 앤'을 읽고 또 읽었다.



지난 12일, 모교 은사이신 이정자 선생님께서 유명을 달리하셨다. 이정자 선생님은 내게 현실 속 '빨강머리 앤' 이셨다. 워낙 무섭고 까칠하셔서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이셨지만, 고교를 졸업할 때까지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내겐 우상이셨다. 처음 중학교에 가서 시간마다 다른 과목 선생님이 들어오시는 게 신기했는데, 담임 선생님이 명동의 멋쟁이보다 더 멋있으신 게 제일 신기했다. 매일 다른 옷을 입고 오시는 그 옷들이 미국 잡지에서나 볼성 부른 최첨단 디자인의 옷들이었기 때문이다. 선생님 패션을 통해서 나도 패션에 눈이 트였던 것 같다.

무서웠던 선생님은 내가 성인이 되어 모교를 찾았을 땐 더할 수 없이 따뜻한 옛 은사 이셨다. 모교의 일에 헌신하시며 졸업생들 누구 한 사람도 소중히 여기셨다. 학원 이사장으로 활발히 활동하시며 지난 7월 모임에도 건강하셨던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80이 넘으셔서도 여전히 첨단 스타일로 옷과 스카프와 백, 구두까지 두루 갖추셨던 선생님, 명석한 예지와 청정한 판단력으로 여성 교육계를 위해 애쓰신 선생님의 21세기 여성적 삶은 닮고 싶은 내 미래기도 하다. 선생님은 떠나실 때도 깔끔하게, 하루 만에 가셨다. 선생님을 보내드리는 깊은 슬픔 속에서도 후배 영선이와 나는 "우리도 선생님처럼 깔끔하게 떠나자" 다짐을 나눴다.

저의 '영원한 빨강머리 앤'이신 이정자 선생님, 하늘나라에서도 계속 앞선 패션으로 멋 내세요. 지상에 남은 저희 숙명인들이 시대를 읽고, 시대를 살아가고, 미래의 희망의 씨를 뿌리는 존재로 꽃피우게 응원해 주세요. 사랑합니다, 선생님!


이영주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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