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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론] 시장의 힘을 믿는 진보

1997년 11월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그 직후 치러진 대선에서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진보파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바로 김대중(DJ) 대통령이었다. 그런데 DJ의 취임 일성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뜻밖에도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창달하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당연했지만, 시장경제란 보수의 트레이드 마크 아니던가. DJ는 재임 중 대체로 일관되게 그 약속을 지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부실기업 정리, 금융 체계 재편을 포함한 모든 개혁을 추진하면서 기본적으로 시장 원리를 적용하고 시장 원리가 발현되도록 풀어냈다. 덕분에 한국은 역사상 가장 단기간에 IMF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DJ에 필적할 만한 진보 지도자가 미국에도 있었다. 바로 2008년 금융 위기로 형편없이 망가진 경제를 이어받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었다. 그 위기가 얼마나 심각했느냐 하면 미국의 초대형 기업들, 예를 들어 GM·시티뱅크·모건스탠리 등이 사실상 파산한 상태였으니 한국으로 치면 현대차·KB금융·우리금융 등이 한꺼번에 파산한 상태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오바마 역시 시장의 원리에 따라 위기를 헤쳐 나갔다. 예컨대 파산한 기업의 주식을 민간이 사도록 했는데, 그들이 1을 내면 그 7배를 정부가 빌려줘 성공하면 그들이 큰돈을 벌게 해 줬다. 부자들에게 특혜를 주는 것이라는 진보의 비난이 쏟아졌지만, 오바마는 꿋꿋하게 시장 원리를 지켜나갔다. 그 덕분에 미국도 불과 1여년 만에 금융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런 부류의 진보 지도자가 많았다. 예를 들어 독일 사민당 슈뢰더 전 총리는 '어젠다 2010'이라 불리는 획기적 개혁 정책을 통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대폭 높이고 낭비적 복지를 과감하게 줄였다. 오늘날 독일 경제가 막강한 위용을 자랑하는 이면엔 그의 공이 가장 컸다는 데 대해 세계적으로 별 이론이 없다. 역시 진보였던 영국 노동당 블레어 전 총리도 마찬가지다. 그가 일관되게 시장 원리를 거스르지 않은 정책을 썼기 때문에 '영국병'을 치유한 보수당의 대처 총리가 이룩한 위대한 업적을 이어갈 수 있었다.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은 무엇보다 창의와 자발성, 즉 시장의 힘을 믿었기 때문에 일관되게 규제를 완화하고 기업의 왕성한 혁신을 진작하는 정책을 썼다. 그 덕분에 미국 경제는 그의 재임 중 평균 3.7%나 성장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누구보다 선명하게 진보를 표방한 지도자였지만 기본적으로 시장의 힘을 믿은 지도자이기도 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가장 웅변적 사례다. 요즘 기업인들을 만나보면 "솔직히 노무현 정권 시절이 기업을 경영하기 좋았다"는 사람들이 많다.

중국 덩샤오핑의 위대함은 막강한 국가의 힘을 자발적으로 시장에 양보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 정말 가난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려면 경제가 커야 하는데, 경제란 인간의 욕심이 자유롭게 발현될 수 있는 환경 아래에서만 무럭무럭 자랄 수 있는 아주 이상한 존재임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위에 열거한 모든 진보 지도자들의 공통점은 경제는 '국가의 힘'보다 '시장의 힘'이 더 유효하다고 믿었다는 사실이다. 그 반대를 믿었던 지도자는 거의 예외 없이 실패했다. 적어도 경제에서는 그랬다.

문재인 정부는 취임 이후 일관되게 시장의 힘보다 국가의 힘을 더 신봉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규제 혁파를 외치기 시작한 문 대통령의 최근 행보가 '깨어 있는 진보' 쪽으로 발상의 전환을 예고하는 신호이기를 기대하는 사람이 많다. 특히 나처럼 한 때 민주당원이었던 사람에게는 그런 바람이 더 큰 것 같다.


전성철 / IGM 세계경영연구원 이사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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