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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의 시민권 미국 역사-6] 흑과 백·남과 북…아물지 않는 미국의 상처

이종호 논설실장
이종호 논설실장

[LA중앙일보] 발행 2018/10/01 미주판 12면 기사입력 2018/09/30 15:00

<6> 남북전쟁과 노예해방

노예해방을 기념한 우표들. 왼쪽부터 노예금지를 규정한 수정헌법 13조 통과 75주년(1940년), 노예해방 150주년(2013년), 100주년(1963년) 기념 우표.

노예해방을 기념한 우표들. 왼쪽부터 노예금지를 규정한 수정헌법 13조 통과 75주년(1940년), 노예해방 150주년(2013년), 100주년(1963년) 기념 우표.

섬터 요새, 게티즈버그 전투 등 남북전쟁을 소재로 한 우표들. 맨 오른쪽은 남군 총사령관 리 장군이 1865년4월9일 애퍼매턱스 코트하우스에서 북군 총사령관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하는 장면이다. [중앙포토]

섬터 요새, 게티즈버그 전투 등 남북전쟁을 소재로 한 우표들. 맨 오른쪽은 남군 총사령관 리 장군이 1865년4월9일 애퍼매턱스 코트하우스에서 북군 총사령관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하는 장면이다. [중앙포토]

#. 남북 분열

남북전쟁(Civil War)은 미국의 가장 큰 상처다. 원인은 복잡다단했다. 가장 단순한 설명은 독립 직후부터 남과 북은 사실상 두 개의 문화, 두 개의 이데올로기로 분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정치적 입장부터 달랐다. 남부 여러 주들은 계속해서 자치권을 가진 주로 남아있기를 원했다. 하지만 미국 정치는 연방정부의 권한이 강해지는 쪽으로 계속 흘러갔다. 남부의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 배경도 판이했다. 북부는 상공업이 비약적으로 발달하고 있었다. 남부는 기존 농업 경제구조를 그대로 유지했다. 담배나 목화를 재배하는 대규모 농장에서 흑인노예의 노동력은 필수였다. 그런 상황에서 노예제도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정치권 최대 현안이 됐다.

19세기 초 미국은 노예를 인정하는 노예주와 인정하지 않는 자유주가 11대 11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서부 개척 및 영토 확장으로 새로운 주들이 연방으로 편입되기 시작하자 남과 북은 의회 주도권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까 두려워했다. 그 두려움은 1819년 미주리주가 노예주로 연방 가입 신청을 하면서 현실이 됐다.

전쟁은 영웅을 낳는다. 남군과 북군 모두 뛰어난 장군이 있었다. 위는 남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 (1807~1870) 장군. 아래는 북군 총사령관 율리시스 그랜트(1822~1885) 장군. 그랜트는 남북전쟁이 끝난 후 미국 18대 대통령이 되었다. 모두 1995년 발행된 우표다.

전쟁은 영웅을 낳는다. 남군과 북군 모두 뛰어난 장군이 있었다. 위는 남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 (1807~1870) 장군. 아래는 북군 총사령관 율리시스 그랜트(1822~1885) 장군. 그랜트는 남북전쟁이 끝난 후 미국 18대 대통령이 되었다. 모두 1995년 발행된 우표다.

남과 북은 격렬한 논쟁 끝에 절충안을 택했다. 미주리주는 노예주로 가입하되 마침 매사추세츠에서 분리한 메인주를 자유주로 연방에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더해 앞으로 새로 연방에 가입하는 주는 북위 36도 30분을 경계로 그 이남은 노예주, 그 이북은 자유주로 하기로 했다. 유명한 1820년 미주리 협정이다.

1849년 캘리포니아가 연방에 가입하면서 상황은 또 달라졌다. 연방의회는 격론 끝에 노예제 허용 여부는 주민 의사에 맡기기로 결정했다. 이미 노예제는 반시대적이었다. 1850년, 불리해진 남부를 달래기 위한 도망노예환송법(Fugitive Slave Act)으로 타협이 이뤄졌다. 다른 주로 도망간 노예는 체포해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 도망 노예를 도운 사람까지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1857년 연방대법원의 드레드 스콧 판결은 노예제를 둘러싼 남북의 대립에 기름을 끼얹었다. 남부에서 태어난 흑인 노예 드레드 스콧(1795~1858)은 주인을 따라 북부로 이사해 자유의 몸이 됐다가 주인이 죽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북부에 사는 동안 노예 신분은 무효가 됐기 때문에 남부에서도 노예가 아님을 인정해 달라고 소송을 냈다. 하지만 연방대법원은 "미주리협정은 백인들의 사유재산권(=노예)을 침해하고 있으므로 위헌"이라며 스콧은 자유인이 아니라 '주인의 재산'이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여태까지의 노예제 반대 운동이나 반대 법안을 일거에 무효로 만들었다. 남부는 환호했고 북부는 분노했다. (이 판결은 사유재산을 보호해야 한다는 헌법 가치를 노예제도 유지 목적에 끌어다 썼다는 점에서 미 역사상 최악의 판결로 기록되었다.)

그 무렵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링컨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됐다. 링컨은 이미 2년 전 행한 연설에서 '분열된 집은 바로 설 수 없다'며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북부의 입장을 대변했다. 1860년 선거에서 링컨은 남부 9개주에선 단 한 표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선거인단 투표에서 과반을 확보해 16대 대통령이 됐다.

남부는 링컨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제일 먼저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연방을 탈퇴했다. 이어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라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가 뒤를 따랐다. 이들은 독자 헌법을 제정하고 제퍼슨 데이비스(1808~1889)를 대통령으로 세웠다. 미합중국은 건국 84년 만에 두 나라로 완전히 쪼개졌다. 다시 연방을 세우는 길은 전쟁밖에 없었다.



#. 남북전쟁과 노예해방

1861년 4월 12일, 첫 포성이 울렸다. 남부연합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항구 내 연방군 요새 섬터(Fort Sumter)를 포격했다. 이후 4년간 처절한 공방전이 계속됐다. 전쟁은 참혹했다. 나라는 피로 넘쳤다.

1862년 9월 7일. 밀리던 북군이 메릴랜드 앤티탬 전투에서 승리했다. 닷새 뒤 링컨은 역사적인 노예해방(Emancipation Proclamation)을 선언했다. 1863년 1월 1일부터 미국내 모든 주의 노예를 해방한다는 내용이었다.

파장은 엄청났다. 남부의 수많은 흑인 노예들이 도망쳐 북군에 가담했다. 남군을 지원할 수도 있었을 영국과 프랑스의 마음도 돌려놓았다. 전세는 북군 쪽으로 확실히 기울었다.

1863년 7월 2일, 게티스버그 전투는 전쟁의 분수령이었다. 남군 7만 5천, 북군 10만 명이 대치했다. 3일간의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고 남군은 퇴각했다. 양측 합쳐 5만 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다. 그곳에 전몰자 묘지와 충혼탑이 건립됐다. 헌납식에서 링컨 대통령이 연설했다. "이들 전사자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것…그것은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이었다.

1865년 4월 3일, 남부연합의 수도 리치몬드가 함락됐다. 4월 9일 남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이 북군 총사령관 그랜트 장군 앞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전쟁은 끝났다. 북군 36만명, 남군 26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남북을 합친 전사자 62만명은 미국 전쟁 역사상 가장 많은 전사자로 기록됐다. 1차대전 때 미군 전사자는 11만5000명, 2차대전 때는 31만 8000명이었다.

후유증은 더 컸다. 남과 북의 골은 오히려 깊어졌다. 흑백의 인종적 증오심은 더 강해졌다. 18만 명이나 되는 흑인이 북군에 합류해 '노예해방'을 위해 싸웠지만 그들이 진정한 '미국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오랜 시간'을 더 견뎌야 했다.

1865년 1월, 남북전쟁 끝무렵 연방의회는 노예제도를 전면금지하는 수정헌법 13조를 통과시켰다. 이로써 미국의 노예제도는 공식 소멸됐다. 하지만 법은 법, 현실은 현실이었다. 흑인들에겐 자유가 주어졌지만 농사지을 땅도, 그들을 지켜줄 법 질서도, 보장받을 권리도 아직은 없었다. 차별은 더 교묘해졌고 노골화됐다.

흑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 KKK단(Ku Klux Klan)도 준동했다. 시작은 전쟁 직후 테네시주에서였다. 전직 사령관, 남부연합 지도자, 교회 목사 등 백인우월주의자들은 조금이라도 자신의 권리에 관심보이는 흑인이나, 그들을 돕는 백인들을 강제로 끌어다 집단 구타하고 심할 경우 올가미에 달아 처형했다.



#. 머나먼 화해의 길

증오와 원한의 상처는 길고 깊었다. 그 때문인지 남부엔 링컨 기념상이 드물다. 대신 지금도 남부 곳곳엔 로버트 리 장군 동상이 서 있다. 많은 남부인들은 그를 북부 침략군에 맞서 고향을 지키기 위해 싸운 영웅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악랄했던 노예제의 상징으로 리 장군의 동상을 바라본다. 1960년대 민권운동 이후 지금까지 백인우월주의를 경계하는 많은 사람들이 리 장군 동상 철거 운동을 벌이고 있는 이유다.

링컨은 '노예해방' 그 하나만으로도 미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 됐다. 하지만 정작 링컨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노예해방이 아니라 연방을 지키는 일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흑인 노예 400만명을 해방시키기 위해 젊은 군인 62만 명이나 희생시킨 그의 선택이 최선이었느냐는 비판도 있다. 그럼에도 노예해방, 미 합중국 수호라는 링컨의 공적을 의심하는 미국인은 거의 없다.

1865년 링컨이 다시 대통령이 됐다. 전쟁으로 깊어진 감정의 골을 메우고 황폐화된 남부를 어떻게 다시 세울 것인가가 재선 대통령의 과제였다. 링컨은 화해와 용서로 다시 하나가 될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4월 14일, 링컨은 극렬 남부주의자의 흉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남부가 항복한지 불과 닷새 뒤였다. 암살자의 이름은 존 부스(John Booth)였다.

주요 연표

-1619년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에 최초의 흑인 노예 들어옴

-1808년 노예수입금지법 통과

-1820년 미주리협정(북위 36도 30분을 경계로 이남은 노예제 허용, 이북은 불허)

-1831년 버지니아 노예 네트 터너 폭동

-1832년 노예반대협회 조직

-1850년 도망노예환송법 제정

-1854년 미주리 협정 폐지.

-1857년 연방대법원 드래드 스콧 판결

-1859년 노예제 반대론자 존 브라운 반란 (버지니아 하퍼스페리 연방 무기고 공격)

-1860년 링컨 16대 대통령 당선

-1861년 남부 11개주 연방 탈퇴, 남부연합 결성, 남북전쟁 발발(~1865)

-1862년 링컨 대통령 노예해방 발표

-1863년 노예해방령 공식 발효

-1863년 링컨 게티스버그 연설

-1865년 노예금지 규정한 수정헌법 13조 통과, 링컨 두 번째 임기 시작, 남부연합 항복, 링컨 대통령 피격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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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권 시험 예상문제 풀이

▶문:어떤 사람들이 미국에 노예로 팔려 왔나? (What group of people was taken to America and sold as slaves?)

답:아프리카인(Africans/people from Africa)

▶문:미국 남부와 북부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무엇이라 하는가? (Name the U.S. war between the North and the South.)

답:The Civil War(남북전쟁) / 주들 간의 전쟁(the War between the States)

▶문:남북전쟁이 발발된 원인 하나만 말해 보라. (Name one problem that led to the Civil War.)

답:노예제도(Slavery) / 경제적인 이유(economic reasons) / 주 정부의 권한(states' rights)

▶문:에이브러햄 링컨의 중요 업적 중 하나는? (What was one important thing that Abraham Lincoln did?)

답:노예 해방(Freed the slaves) / 노예 해방 선언 (Emancipation Proclamation) / 연방 보존 혹은 수호 (saved or preserved the Union) / 남북전쟁 중 미합중국을 이끎(led the United States during the Civil War)

▶문:노예해방선언이 한 일은 무엇인가? (What did the Emancipation Proclamation do?)

답:노예를 해방함(Freed the slaves) / 남부연합 주들의 노예를 해방함(freed slaves in the Confederacy / freed slaves in the Confederate states / freed slaves in most Southern st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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