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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미술이 주는 상처

내 작업실이 있는 정릉 산동네는 근린시설이 변변찮다. 메마른 이 동네에 그나마 커피 향을 맡을 수 있고 책을 볼 수 있는 반듯한 공간이 교회이다.

여기서 간간이 사람들을 만나고 식사도 한다. 항상 모노톤의 복장을 한 중년의 남자분을 여기서 만났다.

한 번은 이분이 내가 화가인 것을 알고 "초등학교 때 미술시간이 가장 괴로웠다"며 어려운 지난 시절을 이야기했다. 너무 가난해서 미술시간에 제대로 도구를 갖추지 못했단다. 매번 선생님이 준비물을 체크했고 그럴 때마다 급우들과 격리되어 뒤에 가 서 있는 벌을 받거나 짝의 크레파스를 겨우 빌려 써야 했다고 한다.

"검정색은 왜 그렇게 빨리 닳는지 그것을 쓸 때마다 더 눈치가 보였다"고 한다. 사물의 테두리를 그리거나 인물의 머리카락, 건물의 지붕을 그릴 일이 많은 아이들 그림에서 검정색은 더 귀하다. 그때 받은 상처 때문인지 그는 지금까지도 컬러풀한 옷을 피하게 된다고 했다. 그의 호소에 나도 공감했다. 12색짜리 크레파스를 준비한 나는 옆자리 친구의 2층짜리 24색 크레파스 앞에 주눅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미술시간은 가진 정도의 차이에서뿐만 아니라 재능의 차이에서도 상처를 준다. "잘한다, 못한다"로 평가받는 표현력과 완성도에 따른 인정은 교실 뒤쪽 게시판에 그림이 걸리게도 하고 대회에 나가 상을 받게도 한다. 예술 중·고등학교를 거쳐 미술대학을 다닌 나로서는 인정의 평가에 항상 포함된 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미술전공자의 경우 치열한 경쟁 속에서, 좌절과 극복의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받은 상처가 더해진다.

문제는 미술이 운동 경기나 음악 콩쿠르와 같이 순위를 매기고 공정한 장소에서 평가될 수 없다는 데 있다. 미술 제작을 고취하기 위한 사생대회와 공모전이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서 수상이 창의와 예술적 성취의 척도는 아니다.

수상자가 이름 없이 사라지고 오히려 낙선자가 미술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인상파 화가들의 예가 그것이다. 시대에 앞서서 상상하고 실험한 전 인생의 실천으로 미술가들은 평가받는다. 제도권의 교육 없이 성공한 미술가도 많다. 고갱과 앙리 루소가 여기에 해당한다. 가난한 함석공의 아들로 태어난 루소는 파리시 세관원으로 근무하며 독학으로 그림을 익혔다. 기성 회화의 테크닉에 갇히지 않은 특유의 원시적 화풍이 이국적이다. 어린아이 같은 순진무구한 환상이 이루어낸 그의 참신한 조형과 색채에 20세기 전위 예술가들은 매혹되었고 경의를 표하게 된다.

미술은 본래 우리에게 상처 주려 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우리는 가진 것과 재능의 여부를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만들어낸 상처 속에 갇힌 것은 아닐까?


전수경 /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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