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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론] '반공방첩' 세대 눈에 비친 요즘 북한

초등학교 시절 시골 학교 블록 담벼락엔 '멸공' '반공방첩' '승공통일' 이란 구호가 씌여 있었다. 붉은색 스프레이 페인트로 어른 키보다 크게 써 붙여 마을 어디에서든 볼 수 있어서 지금도 뇌리에 깊이 박혀 있는 단어들이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일 중의 하나는 반공일(토요일) 귀가시 행진을 하며 군가를 불러야 했던 기억이다. 촌동네라 아이들은 모두 신작로를 따라 걸어서 통학을 했다. 토요일 오전 수업이 끝나면 운동장에 동네별로 집합 시켜놓고, 집에 갈 때까지 군가를 부르게 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다는 이승복 노래부터 향토예비군의 노래, '맹호들은 간다' 같은 파월군가까지… 아이들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불러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반공 교육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포스터 그리기와 웅변, 글짓기 대회의 주제도 방공, 승공이념에 맞춰져 있었다. 유학생들도 정보기관으로부터 반공 교육을 받지 않으면 비행기를 탈 수 없었다.



철저한 세뇌교육은 주효했다. 시골 학교를 떠난 지 47년이 지난 최근까지도 북녘하늘만 봐도 막연한 두려움을 느껴야 했고, 북한 괴뢰군과 전쟁에 대한 공포는 깊은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전쟁을 경험해 보지 않고 반공교육만 받은 세대도 그런데, 하물며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은 6·25 세대들에게 그 트라우마는 얼마나 심할까.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나를 지배했던 그 트라우마는 그러나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보면서 말끔히 사라졌다. 알고 보니 그들은 늑대의 탈을 쓴 것도, 머리에 뿔이 달린 도깨비도 아니었다. 비록 남한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처참한 전쟁을 벌이고, 정치적 대립과 긴장 속에서 살아왔지만 그들도 원했던 것은 '평화'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 3차 남북정상회담의 가장 큰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왕조시대 뺨치는 독재와 3대에 이르는 세습, 무자비한 인권탄압으로 국제사회로부터 '왕따' 당해온 동토의 땅 북한에도 봄이 왔다. 지난 10여년 사이 북한은 놀랄 정도로 변했다. 뉴욕 맨해튼을 방불케 하는 고층빌딩들, 가로수와 잔디가 잘 가꾸어진 평양거리는 말 그대로 상전벽해다. 여성들의 옷차림과 평양 시민들의 표정도 한결 밝아졌다. 곳곳에 나붙었던 미제 타도, 남조선 인민해방, 혁명구호 따위도 말끔히 사라졌다.

변화를 가장 실감 나게 보여 준 건 '지존' 김정은 위원장과 그의 아내 이설주의 태도다. "사진을 찍어 주겠다" 는 농을 스스럼없이 던지는 김 위원장, 김정숙 여사의 팔짱을 끼고 천지로 내려가는 이설주의 모습에서 '아,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같은 민족, 형제들이구나' 라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남한 사회는 달라지지 않고 있다. 아니 아직 실감하지 못하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지도 모르겠다. 일부 야당 정치인이나 보수언론들도 핵 문제에만 관심을 보일 뿐, 이런 변화나 민족간의 합의는 애써 외면하고 있는 듯 보인다. TV를 통해 여과 없이 북한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았을테지만 아직도 거대한 변화와 역사의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여전히 '반공방첩' 과 '승공통일'의 구호와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있는 것만 같다.

백두에서 한라까지, "천지에 붓을 담가 우리 민족의 새 역사를 쓰자" 는 김정은 위원장의 충격적인 제안은 정말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을 가져다 줄 이정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남북이 총을 내려 놓고, 남한 사람들도 기차 타고 백두산을 오르고, 이산가족들은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는 데, 왜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 걸까.

꿈이라면, 제발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공완섭 /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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