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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유튜브의 축약본 세상

[LA중앙일보] 발행 2018/10/17 미주판 20면 기사입력 2018/10/16 18:46

어떤 것은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예를 들면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에서 '인환(寅煥)네 처갓집 옆의'라는 구절은 다른 구절보다 유난히 선명하게 기억난다. 이 구절은 전체 5연 가운데 3번째 연에 있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寅煥)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무수한 시어 중에서 상대적으로 사소해 보이는 '인환네 처갓집'이 왜 이렇게 기억나는지 모르겠다.

'나는 너다 503'에 나오는 "생략할 수 없는 걸음으로"도 그렇다. 황지우의 많고 많은 시구 중에서 시간이 흘러도 푸르게 빛난다. 가끔은 전후 사정도 없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16일 열린 다저스와 브루어스의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 3차전 경기 때도 그랬다. 나중에 유튜브 버전으로 보던 중 문득 '생략할 수 없는 걸음으로'가 떠올랐다. 야구 경기를 보면서 황지우의 시구가 떠오르다니. 경기는 끝났지만 야구와 시구 사이의 불분명한 전후 맥락은 여전히 모호했다. 뭘까.

그건 너무 많은 걸음을 생략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생략해도 되는 거야' 하는 의문이 조금씩 쌓이다 불안감으로 뭉쳤을 때 기억이 당장 눈에 띄는 구절 하나를 불쑥 꺼내 든 것일까. 기억이 제기한 옐로카드쯤 될까.

유튜브는 편리했지만 의구심은 고개를 들었다. 의구심의 뿌리는 축약과 폐쇄성이었다.

유튜브 안에서 세상은 늘 축약돼 있었다. 깔끔하게 요약 정리된 세상은 편하기 그지없었지만 원본과의 담은 조금씩 높아졌다. 야구 경기도 원본은 3시간쯤 되겠지만 유튜브 축약본은 길어야 10분 내외다. 걸음은 생략할 수 없다지만 유튜브에서는 생략된 걸음이 훨씬 많았다. 몇 걸음 걷지 않아도 됐다. 스포츠 경기의 드라마 요소는 모조리 제거되니 경기의 큰 흐름이나 반전, 암시 등을 음미할 리가 없다. 경기만이 아니다. 이젠 영화평이 유튜브로 대거 넘어와 영화 한 편은 10분대면 정리해준다. 이마저도 아무 때나 넘기며 볼 수 있다.

이러니 봤으나 안 본 것과 진배없고 경험했으되 경험하지 않은 것과 딱히 다르지 않은 비몽사몽의 연속이다. 그러고는 새로운 것을 보겠다고 허겁지겁 다른 영상을 찾는다. 설렘과 긴장, 실망과 환호의 과정은 건너뛰고 결과만 날름 삼키는 간편식 편향이 얼마 안 가 습성이 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숨차게 명소를 찾아 사진을 찍었으나 뭘 봤는지 자신도 알 수 없는 얼치기 여행자가 되지 않을까 두려웠을 것이다.

유튜브는 미로다. 유튜브라는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동네가 있지만 동네마다 미로다. 한번 발을 들이면 동네를 빠져나가기 어렵다.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나갈 때는 마음대로 못 한다. 야구를 몇 차례 검색하거나 보면 갑자기 온 세상이 야구나 스포츠로 변한다. 메이저리그 플레이오프를 일주일 정도 봤더니 가도 가도 스포츠인 미로에 갇힌 느낌이었다. 이건 '너의 취향을 존중할게'가 아니라 '너는 포위됐다'는 위협으로 느껴졌다. 겉에서 보면 개방형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더없이 폐쇄적이다. 삼시 세끼 같은 음식만 먹으라고 강요한다.

이쯤 되면 유튜브는 좀 무섭다. 유튜브는 우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우연은 무언가를 새롭게 하는 매우 효과적인 방식의 하나인데 지금까지의 취향과 기호를 논리적인 방식으로 강요한다. 태어난 마을을 떠나기 힘든 중세 봉건시대 생활 방식이다. 축약본 세상은 달콤했지만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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