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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광장] 콩자반과 염소똥

어린 시절 우리는 혜화동 보성중학교 뒤쪽 성북동에 살았다. 당시 혜화동은 문안이라고 불렀다. 4대 문 안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개 넘어 성북동은 문밖이고 시골이었다.

우리 동네 앞에는 개울이 있어 더운 여름이면 미역도 감고 근처 동굴에 있는 시원한 약수물도 떠다 마셨다. 성북국민학교 옆 간송 미술관 앞 잔디에서 우리는 목말 타기도 하며 놀았다. 겨울에 개울이 얼면 썰매도 타고 정월 보름이면 쥐불 놀이도 하고 봄이면 앵두도 따 먹고 여름에는 살구도 따 먹으며 어린 시절을 서울 시골에서 살았다. 남북한이 다 즐겨 부르는 노래 '고향의 봄'에 나오는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피는 낙원에서 놀던 때가 그립다.

부모님이 교육자라서 그런지 학교는 문안의 혜화국민학교를 다녔는데 나는 학교 끝나고 고개를 넘어 집에 오면 네살배기 계집애 동생 정은이를 업고 성벽 위에 가서 놀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그때 그 동생이 까만 염소똥을 콩자반인 줄 알고 열심히 주워서 주머니에 넣던 기억이 난다.

난 동생이 좋아하는 방아깨비도 잡아주고 잠자리도 잡아주며 놀아 주었는데 두 살 위의 보성중학교 1학년 형 그리고 다섯 살 아래 남동생보다 일곱 살 아래 정은이를 끔찍이나 많이 귀여워해 준 것 같다. 어머니 말씀대로 정은이는 눈도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현대 미인으로 앞으로 크면 피아니스트가 될 거라고 하며 가족 모두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우리의 꿈은 1950년 6·25전쟁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9·28 서울 수복도 잠시, 중공군의 참전으로 1951년 1·4 후퇴 때 우리는 추운 겨울에 걸어서 어머니 친척이 있는 공주로 피란을 갔는데 그곳에서도 지내기가 힘들어 다시 작은 아버지가 계신 상주로 고생 고생 걸어서 갔다. 그 와중에 제일 어린 정은이가 폐렴에 걸렸다. 지금 같으면 페니실린 주사 한 대만 맞으면 살 수가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안타깝게도 그런 게 없었다.

그날 아침에는 나와 정은이만 사랑방에 있었는데 시름시름 앓던 정은이의 숨이 갑자기 뚝 끊어졌다. 12살이나 됐지만 동생이 죽은 그 순간 나는 정말 무서웠다. 다급하게 작은 아버지를 불렀고 손과 발에 사관을 떠서 다시 숨통을 틔웠지만 아버지가 10리나 되는 면에 있는 병원을 가는 도중에 결국 숨지고 말았다.

우리 식구 모두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어린 나이에 사랑하는 동생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정말 가슴이 메인다. 우리집도 전쟁의 고통과 슬픔을 피할 수는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다시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안 된다고 미국에 강력하게 선포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김영훈 / 전 한국수입업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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