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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의 시민권 미국역사] '사람 대접' 받기 위한 피와 눈물의 투쟁

(8)민권운동Civil Rights Movement>

시민권 시험 예상문제 풀이

▶문:수전 B. 앤서니는 무슨 일을 했는가?(What did Susan B. Anthony do?)

답:19세기 미국의 대표적 사회운동가로 여성 참정권 운동, 노예제도 폐지 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여성 권리를 위한 투쟁(Fought for women's rights) / 민권 투쟁 (Fought for civil rights)이 모범 답안이다.

▶문:인종 차별을 종식시키려고 노력한 것은 무슨 운동인가?(What movement tried to end racial discrimination?)



답:민권 운동(civil rights movement)이다. 1950년대부터 시작해 1960년대에 본격화됐다.

▶문: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무슨 일을 했는가?(What did Martin Luther King, Jr. do?)

답:19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을 이끌며 미국 정신의 상징이 됐다. 질문엔 민권 투쟁(Fought for civil rights) / 모든 미국인들의 평등을 위한 노력(Worked for equality for all Americans) 등으로 대답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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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독립한지 250년이 못됐지만 일찌감치 세계 일등 국가가 됐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끄러운 장면들이 많다. 더 놀라운 것은 많은 미국인들이 그런 수치의 역사에 맞서 싸우며 끊임없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만들어 왔다는 것이다. 흔히 '미국의 정신'으로 일컬어지는 자유와 평등, 인권과 관용은 바로 그런 투쟁의 산물이다. 미국인의 저항정신을 대표하는 민권운동에 대해 알아본다.

#. 여성 참정권 운동

미국에서 여성이 참정권을 갖게 된 것은 채 100년이 안 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연방헌법 제정 당시 참정권 부여 문제는 각 주의 소관에 맡겼다. 그러자 대부분의 주는 납세와 재산소유 정도에 따라 투표권을 제한했고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이런 제한이 철폐됐다. 그럼에도 참정권은 여전히 백인 남성만의 문제였고 흑인과 여성은 아무런 해당상황이 없었다. 그들이 진짜 '사람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더 많은 땀과 눈물, 더 오랜 기다림이 필요했다.

1848년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최초의 여성 대중 집회가 뉴욕주 세네카폴스에서 열렸다. 참가자들은 법 앞에서의 남녀 평등, 교육과 고용에서 기회 균등, 여성 참정권 등을 요구했다. 이후 여러 여성 단체가 생기면서 여성 인권 향상과 구체적인 참정권 획득 노력이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람이 수전 B. 앤서니(Susan Brownell Anthony, 1820~1906)였다.

1872년 11월 대통령 선거를 앞둔 어느 날, 앤서니는 밧줄로 몸을 묶은 채 뉴욕주 로체스터 선거 사무실에 나타났다. "투표권 없는 자유는 가짜"라며 그녀는 유권자 등록을 강행했고, 며칠 뒤 금지된 투표까지 했다. 하지만 "여자가 어찌 감히 투표를"이라며 격분한 한 남자가 그녀를 고발했다. 100달러의 벌금형이 내려졌다. 앤서니는 부당한 벌금은 낼 수 없다며 납부를 거부하며 여성 인권 운동에 더욱 매진했다.

앤서니가 여성 차별을 실감한 것은 교사로 근무했던 학교에서였다. 당시 여교사 연봉은 남자 교사의 3분의 1 수준에도 못 미쳤다. 이런 현실을 견딜 수 없었던 앤서니는 30세에 교직을 떠났고 그 때부터 여성운동에 발을 들여놓았다. 남성 중심의 사회가 만들어낸 고정관념과 여성차별이라는 편견에 맞서 평생을 싸웠던 앤서니는 미국 여성 참정권 운동의 어머니로 불린다. 그녀의 분투는 사후 14년만에 결실을 맺었다. 1920년 미국 수정헌법 19조는 "성별의 차이 때문에 선거권이 거부되거나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며 여성 참정권을 인정했다.

#. 흑인 민권운동

노예해방 선언 이후 100년 가까이 흘렀지만 미국은 여전히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만의 세상이었다. 흑인의 지위도 2등 국민에 머물러 있었다. 1870년 수정헌법 15조로 투표권은 부여됐지만 실제 투표를 할 수 있는 흑인은 거의 없었다. 특히 남부 여러 주들은 온갖 트집을 잡아 흑인의 투표권 행사를 방해했다. 문맹검사(Literacy test)까지 도입해 헌법을 해독하고 글을 읽고 쓸줄 안다는 것을 증명하는 시험까지 보게 하며 투표를 막았다. 시험지엔 비누 거품 속 물방울이 몇 개인지를 묻는 황당한 문항까지 있었다.

흑백분리 정책도 공공연히 자행됐다. 이른 바 짐 크로법(Jim Crow Laws)에 따라 흑인은 백인과는 다른 학교를 다녀야 했고 열차, 식당, 호텔 등의 출입도 제한됐다. 공원 수도꼭지도 흑백이 분리되어 있었고 공공 화장실 역시 유색인종(Colored)이라고 쓰인 것만 사용해야 했다.

근거는 1896년의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이었다. 이는 혼혈이었던 호머 플레시가 백인 전용 1등석 객차에 탔다가 체포된 후 제기한 소송에서 시작됐다. 결국 당시 퍼거슨 판사가 있던 루이지애나 법원은 흑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차별이 아니라 구별일 뿐"이라며 평등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는 흑인에게 시민권을 주고 투표권을 부여했던 수정헌법 14조, 15조를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었다. 1960년대 초까지도 남부 중심으로 '합법적인 흑인 차별'이 만연했던 것은 이 판결의 영향이었다.

그래도 변화의 바람은 거스를 수 없었다. 1951년 캔자스주 토피카에 8살 흑인소녀 린다 브라운이 살고 있었다. 그는 흑백분리 정책에 따라 집 바로 근처 학교를 두고도 1마일이나 떨어진 흑인 학교를 날마다 걸어서 가야 했다.

린다의 아버지 올리브 브라운은 전학 신청을 했지만 거절당하자 소송을 제기했다. 유명한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소송의 시작이었다. 3년만인 1954년 5월 마침내 '공립학교의 흑백 분리는 명백한 위헌'이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60년 가까이 미국 사회를 지배해 온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을 뒤집은 역사적인 판결이었다.

이제 흑백 학생들이 한 교실에서 함께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하지만 남부의 학교들은 여전히 흑인 학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50년대 말까지도 흑백 통합학교에 다니는 흑인 학생은 여전히 1%가 되지 못했다. 1957년 아칸소주 리틀록에선 흑인 학생 9명이 백인 중심의 고등학교로 진학하려 했지만 주지사는 군대를 동원해서까지 이들을 막았다. 9명 학생들은 온갖 멸시 수모를 겪으면서도 꿋꿋이 견뎌냈다. 이들 '리틀록 9인'은 52년 뒤, 2009년 흑인 첫 대통령 버락 오바마 취임식에 초청받는 영광을 누렸다.

이 무렵 흑인 젊은이들은 백인 전용 식당에 들어가 앉아 주문하는 싯인(Sit in)운동 등을 펼치며 차별에 항거했다. 결정적인 사건은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카운티에서 일어났다. 1955년 12월 1일 흑인 여성 재봉사 로자 파크스(Rosa Parks, 1913~2005)가 버스에서 백인 남성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이 사건은 곧바로 전국적인 이슈가 되었다. 로자 파크스를 지지하며 흑백차별 철폐 시위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흑인들의 버스 승차 거부운동도 이어졌다.

운동의 중심엔 26세의 젊은 흑인 목사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이 있었다. 킹 목사는 다른 흑인 지도자들과 함께 381일간 버스 안타기 운동을 전개했다. 1년 뒤 연방 대법원은 버스에서의 인종 차별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간디의 비폭력주의에 바탕을 둔 평화적 인권운동을 이끌었던 킹 목사는 일약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다.

1963년 6월, 케네디 대통령은 흑인에 대한 모든 정치적 사회적 차별 철폐를 규정한 새로운 민권법을 제안했다. 남부 여러 주들은 필사적으로 법안 저지에 나섰다. 민권운동가들은 이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대규모 '워싱턴 행진'을 기획했다. 25만 명이 모였다. 그들 앞에서 킹 목사가 연설했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나의 어린아이들이 언젠가는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이는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 연설과 함께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연설로 기록됐다. '아이 해브 드림(I have dream)'이란 연설이었다.

킹 목사는 1964년 타임지의 '올해의 인물'로 선정됐다. 그해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다. 하지만 1968년 암살당했다.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1986년부터 1월 셋째주 월요일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개인의 탄생일이 연방 공휴일이 된 것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에 이어 두 번째였다.

1964년 마침내 민권법(The Civil Rights Act) 공식 발효됐다. 미국에선 더 이상 인종, 민족, 출신 국가, 종교와 성별에 따른 차이로 차별할 수가 없게 됐다. 1965년엔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도 통과됐다. 피부색에 따른 투표권 제한을 금지시킨 법이었다. 이후 흑인의 투표율은 70% 이상으로 치솟았다. 흑인 정치 지도자들이 잇따라 배출되었고 흑인의 지위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절정은 2008년 흑인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이었다.

#. 공짜 자유는 없다

자유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토머스 제퍼슨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파란과 곡절 끝에 얻어진 평등의 권리, 그 과정을 미국 역사는 민권운동(Civil Rights Movement)이라 부른다. 1954년 브라운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과 1955년 로사 파크스에 의한 버스 승차 거부운동으로 시작했고, 1964년 민권법과 1965년 투표권법으로 결실을 맺은 민권운동의 과실은 이제 흑인 뿐 아니라 아시안 이민자를 포함해 다른 모든 소수자들도 함께 나누고 있다.

하지만 이런 관용과 평등을 부정하며 '그들만의 번영'을 추구하려는 부류가 여전히 있다. 당파적 이익에만 골몰하는 정치인,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원리주의 종교인, 편견에 물든 인종주의자들이 그들이다. 그렇지만 그들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 또한 여전히 있어 미국은 건재하다. 어느 시대나 발전의 걸림돌은 배척받던 소수자가 아니라 그들을 억압하던 기득권 세력 그들 자신이었음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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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민권운동 관련 주요 연표

▶1862년 : 링컨 대통령 노예해방선언

▶1866년 : 수정헌법 14조 비준(흑인에게도 시민권 인정)

▶1870년 : 수정헌법 15조 통과(흑인에게도 투표권 부여)

▶1896년 :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 판결

(흑백 차별은 구별일 뿐 위헌이 아님을 인정)

▶1920년 : 수정헌법 19조 발효(여성 참정권 인정)

▶1954년 :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

(공립학교의 흑백 분리 교육은 위헌 판결)

▶1955년 :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카운티서 로자 파크스 체포.

흑인들 버스 승차거부 운동 전개.

▶1956년 : 연방대법원 '버스에서의 흑백 분리는 위헌" 판결

▶1957년 : 9명의 흑인 학생 아칸소주 리틀록 센트럴고교 등교 시위

▶1961년 : 프리덤 라이더 운동(민권운동가와 대학생들이 흑백 분리

반대를 위해 장거리 버스를 타고 남부지역 순회)

▶1963년 : 워싱턴 행진, 킹 목사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연설(사진)

▶1964년 : 민권법 제정

(인종, 피부색, 종교, 성별 등에 따른 일체의 차별 철폐)

▶1965년 : 투표권법 제정 (피부색에 따른 투표 제한 일체 금지)

▶1968년 : 마틴 루터 킹 목사 피살


이종호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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