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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에 출전했던 달라스 사람들

명성을 날렸던 육상 정교모, 이학자 부부
로마 올림픽과 동경올림픽 참가

4년마다 개최되는 올림픽에 선수로 참가했다는 것은 선수개인에게는 최대의 영광인데, 북경 올림픽 시즌을 맞아 우리 이웃 중에 모국의 명예를 위한 삶을 살았던 훌륭한 스포츠맨들이 있어 강영한 기자가 만나 보았다.

“지난 8일 제29회 2008 베이징 올림픽 입장식을 TV로 보면서 가슴이 뛰고 뭉클했으며, 마치 제가 그 한가운데 서있는 착각까지 했습니다.” 올림픽에 출전했던 달라스 사람들 중 지극히 몇 명 안 되는 정교모(70세), 이학자(68세) 부부의 소감이다.

정교모 씨는 육상 중거리 800M, 1500M 선수로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 66년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 1964년 동경 올림픽에 출전하여 7등을 차지하여 예선에서 탈락하는 아쉬움을 남겼지만, 1960년대를 풍미했던 유명한 선수시절을 보냈다.

당시에 육상선수로 국제대회에 출전하려면 100M를 10초03 이내 주파해야 가능했는데, 정교모 선수가 세웠던 한국 신기록 육상 중거리 800M 1분 51초와 1,500M 3분 51초 05는 11년 동안(1961년부터 1972년까지) 깨지지 않고 유지되어 추종을 불허해 명성을 날렸다.



정교모 씨는 동경올림픽을 회상하면서 생애 한번인 기회를 맞아 혼신을 다해 후회 없이 달려, 뛰고 난후 혼절한 상태였다고 술회했다.

또 부인 이학자 씨는 이화여고 다니던 시절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처음 시작된 800M 육상 중거리 선수로 출전했는데, 한국 신기록 2분 48초보다 10초를 단축하여 2분 38초로 들어왔으나 세계적인 벽에 부딪혀 예선탈락을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4.19 혁명이 발생한지 얼마 안 되어 나라가 혼란한 중에 36명의 올림픽 대표단 중에서, 선수는 절반 정도이고 그나마 여자선수로는 기계체조 유명자 선수와 단둘뿐이었다고 말했다.

62년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에 출전했지만 정치적(대만, 북한문제) 문제가 대두되어 경기를 하지 못하고 돌아온 속상했던 체험도 겪었으며, 1964년 동경올림픽에 출전하여 처음 생긴 여자 5종 경기(80M 허들/ 200M 단거리 육상/ 높이뛰기/ 넓이뛰기/ 투포환)에서 19위를 기록했지만 당시 매스컴에서는 슈퍼우먼으로 소개했다.

정교모 씨와 이학자 씨는 경희대학교 체육과, 한국전력 육상선수단, 국가대표 육상선수로 함께 활동하면서,1972년 대한체육회에서 처음 만든 선수훈련소(동승동)와 태능선수촌에서 같은 코치 아래서 함께 육상의 트랙을 뛰다가, 마침내 1967년 결혼하여 한평생을 모범적인 가정을 이루어 왔다.

결혼과 동시에 은퇴하자 매스컴에서는 박신자(농구), 이홍만(권투) 등과 함께 사라진 별들로 소개되기도 했는데, 동경올림픽을 기준으로 대표선수들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빛내리교회 장로인 정교모 이학자 씨 부부는 1남1녀를 두고 있으며 다운타운 근처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면서, 초대 달라스 대한체육회 회장, 재미대한체육회 육상협회장, 필라델피아 미주체전 조직위원장 등 체육발전에 큰 기여를 해온 달라스 체육계의 원로이다.

이학자 씨는 베이징 올림픽 경기를 보면서 고국에서 후배양성을 위해 노력했어야 하는 미련도 가져보았으며, 달라스 라이온스 라이오네스 회장으로 이리자 한복연구소를 초대하여 힐튼호텔에서 참전용사들을 모시고 한복 패션쇼를 한 것을 보람으로 여긴다며 위안을 삼았다고 한다.


강영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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