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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네트워크] 임청각 500년, 임시정부 100년

"조상 대대로 물려 내려온 이 집에 종부(宗婦)로서 처음 들어서자 만감이 교차했다. 말로는 어떻게 표현하기 어려운 감회가 몰려왔다. 객지에서 땟거리 걱정만 하고 어른들 탕약 시중이나 들던 내가 이제부터는 이 가문의 종부 노릇을 잘 해낼지 걱정이 앞섰다."

1997년 일기로 타계한 허은 여사의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의 일부다. 여기서 '이 집'은 경북 안동시에 있는 임청각(臨淸閣·보물 제182호)을 말한다. 고성 이씨 종택이자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명소다. 임시정부 첫 국무령(국가수반)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1858~1932) 선생의 생가로 유명하다. 석주의 손자며느리인 허은 여사는 석주가 이역만리 만주에서 타계하자 다시 짐을 싸서 안동 임청각으로 돌아왔다.

일제는 독립운동가 집안을 그냥 두지 않았다. 석주 선생 삼년상 내내 일본 형사들이 상주하며 감시했다. 드나드는 사람을 검문하니 가까운 친척도 찾아다니지 못할 정도였다. 허은 여사는 한탄했다. "그때 그런 짓을 했던 일본놈 앞잡이 형사가 나중에 참의원 선거에 후보로 나왔다. 참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허은 여사는 올 광복절에 독립유공자로 선정됐다.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여섯 살 되던 1915년 일가족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한 이후 1932년 귀국 때까지 시댁 어른 등 독립투사들의 식량·의복 등을 헌신적으로 지원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임청각에서 나온 10번째 독립유공자이자 첫 번째 여성운동가다. 그 직전까지 석주 선생 및 아들과 동생, 조카 등 9명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됐다. 이들 10명의 독립투쟁 기간만 합해도 400년이 넘는다.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드문 애국 집안이다.



임청각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살림집이다. 1519년 첫 주인 이명이 낙동강가에 정자를 지은 게 시초가 됐다. 북으로 산을 등지고, 남으로 강을 향한 풍경이 좋아 조선시대 수많은 묵객들이 찾았다. 안채·사랑채·행랑채는 물론 별당·사당·정원을 갖춘 전형적인 상류주택으로 내년이면 건립 500년을 맞는다. 독특한 구조와 쓰임새로 건축사적 의미도 크다.

임청각은 지난해 일반에 부각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에 요구되는 도덕적 의무)의 상징으로 언급하면서다. 문 대통령은 당시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임청각 복원 의지를 밝혔다. 원래 99칸짜리 기와집인 임청각은 일제가 1941년 중앙선 철도를 집안 마당에 내면서 50여 칸만 남게 됐다. 문 대통령은 지난 7월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회 출범식에서도 임청각 복원 필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올 2월 말 3·1절을 앞두고 임청각을 찾아간 적이 있다. 석주의 현손(玄孫·증손자의 아들) 이창수(53)씨가 동행했다. 그때 임청각 방안에 걸린 문 대통령의 글씨가 눈에 띄었다. 국회의원 시절인 2016년 5월 임청각을 찾은 문 대통령은 이렇게 썼다. '충절의 집에서 석주 이상룡 선생의 멸사봉공 애국애족 정신을 새기며. 임청각의 완전한 복원을 다짐합니다.'

대통령의 힘은 역시 세다. 문화재청이 최근 임청각 복원·정비 계획을 발표했다. 내년부터 2025년까지 7년간 280억원을 들여 일제강점기 이전 모습을 되찾겠다고 했다. 지금은 사라진 가옥 3동, 철도 개설로 망가진 주변 지형, 옛 나루터 등을 되살릴 예정이다. 임청각 진입부에 석주의 유물 등을 전시하는 기념관도 새로 만든다. 여덟 달 전 이창수씨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일제가 망친 석주 할아버지의 생가, 옛 모습 찾는 날이 진정한 독립의 날"이라고 했다. 임청각 500년을 지켜온 후손의 나직한 변(辯)이 되레 크게 들려왔다.

내년은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 임청각이 혹시라도 대한민국 건국일 논란 등 소모적 정쟁에 동원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건 석주 선생, 나아가 임청각 500년을 두 번 죽이는 일이 될 수 있다.


박정호 / 한국 중앙일보 문화스포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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